'책임'에 대한 소고
나는 나를 초라하게 보지는 않지만 작게 본다.
나는 나를 화려하게 여기지 않지만 귀하게 여긴다.
나는 나를 위대하다 생각지 않지만 대견하다 생각한다.
나는 나를 천박하다 취급하지 않지만 부족함을 잘안다.
나는 나를 산만하다 느끼지 않지만 정확하지 않음도 안다.
나는 나를 무식하다 말하지 않지만 무지하다고 인정한다.
나는 나를 부유하다 규정하지 못하지만 결코 가난해질 수 없는 존재라 규정한다.
나는 대자연에 기대어 숨쉬는 다른 모든 생명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니, 어쩌면 나는 작은 모종삽으로 살짝만 퍼도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는 아직 자라지 못한 나약한 생명체일지도 모른다. 어린 모종이야 그럴만 하다지만 어른인 내가 여기서 저기로 아직도 옮겨지는 존재라면 한없이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
오래전부터 나는 인간이 스스로 규정한 고등동물로서의 가치를 스스로 잃어가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자연의 위대함을 가슴 깊이 느끼면서부터는 더욱 이 생각은 강해졌다. 하등하다 고등하다라는 규정 자체도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어차피 시작부터 팔이 안으로 굽은 편협된 설정에서 비롯된 분류다.
위대하다는 것은 가장 본성적인 삶을 사는 생명에게 이름붙여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偉大(클위, 클대)
크고도 크다....
분명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태어나면서 심겨진 커다란 자신을 제대로 현실화시켜 커다란 힘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이,
정말 크게 크게 자신을 키우고 크게 크게 나누며 사는 이,
가장 커다란 것은 자연이 부여한 그대로의 본성대로 사는 것임을 아는 이에게 위대하다는 말은 어울린다.
모든 생명체는 교육과 학습으로 종족보존과 후손양성을 이뤄간다.
인간은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작금의 교육은 제도를 위해, 인간의 정신을 규격화하는 데 힘쓰고 있다.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기 위한 고급노예를 생산하는 것에 모든 교육이 열심이다. 대기업취직을 종용하고 월급 몇푼에 서열이 나뉘고 아파트평수에 행복순위가 결정되고.. 혹 노예를 벗어나 창업을 꿈꾸지만 성공률은 1% 정도이거나 그나마 성공했다 하더라도 거대자본으로 흡수되는 수순을 거치게 된다.
소수를 위해 다수들은 자신의 위치와 길을 잃은 채 그저 열심히만 달린다. 아주 작은 모종삽으로도 쉽게 자리가 옮겨진다. 그리고 또 부드럽게 들려오는 소리에 얇은 귀는 펄럭댄다. 노력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면서 여기서 또 열심히 해보라는... '어떤'노력인지에 대해 함구한 채 그들의 노력자체만을 신성시하며 부추긴다. 열정을 가지라 하고 의지를 불태우라 한다. 무엇을 위해? 소수의 부를 위해 다수는 이런 속임수에 참으로 잘 넘어가버린다. 교육의 효과다. 노력, 열정, 의지가 과하게 생성되지만 한쪽으로 흡수되고 있는 줄도 모른채...
이런 사태들과 결과된 것들을 거론하는 것에 인색한 것인지 무심한 것인지 여하튼 나는 인간으로서의 나를 찾는 길을 우선으로 정했다. 내가 진심으로 내 생을 다하는 것에 노력을, 대가를, 열정을, 꾸준함을 보탤 것이지 결코 소수의 노예로서 나를 잃어가는 길은 걷지 않기로 했다.
이런 나에게 '책임'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명확하게 답변할 수 있다.
나의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는 것.
나로서 세상에 존재하라는 명대로 나를 찾고 알고 키워내어 세상의 조화를 이루는 한 개체가 되는 것.
그렇게 나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자식을 당당한 또 하나의 개체로 키워내는 것.
죽음앞의 나에게 내 삶의 선용(善用)을 물으면 썩 쓰일만한 유전을 유산으로 남겼다 당당할 수 있는 것.
나에게 부여된 책임의 시작은 여기부터다.
여기저기 꿀을 찾아 다니는 벌이나
여기저기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초원의 사자나
여기저기 자기 씨를 퍼뜨리려는 민들레나
여기저기 자기 체취를 묻히며 산책하는 강아지나
모두가 한결같이 주어진 조건 안에서 본성에 착실히 의지하며 조화를 이룬다.
좁아진 하늘 위를 맴맴 돌며 먹이를 탐하는 매도
선술집 어닝아래에 아슬아슬하게 둥지를 튼 제비도
전봇대 사이에 자기 영역을 멋드러지게 제작한 거미도
등산객 사이에 가끔 얼굴비추며 먹이찾아 나선 고라니도
어쩌다 저 탄천에 둥지를 틀었는지 모르는 너구리가족도
그 어떤 생명체도 하늘이 좁아졌느니 왜 인공탄천이 생겼느니 왜 전봇대가 길을 막느니 왜 사람들이 여기까지 올라오느니 아무 탓없이 그저. 주어진 환경에서 본능을 최대한도로 키워내며 자신의 삶을 이어간다. 이들에겐 '가공'이 없다. 그저 자연에 대한 믿음만 존재한다.
인간은 자기 본성을 잃어가는 줄도 모른 채 여기서는 이것을, 저기서는 저것을 걸치려, 들으려, 말하려, 보이려 애쓴다. 저 무리에 들어가면 마치 세상이 날 성공자라고 불러주리라 믿는 듯, 마치 상대에게 잘 보이면 나의 삶이 달라지기라도 하는 듯 두 눈을 질끈 감고 앞만 보고 달린다. 머리를 조아린다. 서열에 자신을 매어둔다. 위계에 알아서 들어선다. 그렇게 자신이 스멀스멀 마모, 소모되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만. 살아간다.
본성에서 멀어져야만 적응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든 자 누구인가?
양서(良書)보다 숫자에 익숙해야 하는 능력주의 문화를 만든 자 누구인가?
자신보다 명함에 자기를 맞추도록 삶을 이끈 자 누구인가?
자연으로 향해야 할 시야에 마필가리개를 씌운 자 누구인가?
자신의 꿈보다 소수의 꿈을 위해 살도록 감각을 둔화시킨 자 누구인가?
지속된 세뇌를 통해 현대적빈곤과 그 극단의 차이로 인한 불안감을 조성한 자 누구인가?
습득시킬 교육이 곧 사라질 직업을 위한 것임을 알면서도 체제유지를 위한 변명에 능숙한 자 누구인가?
누구를, 무엇을, 어디를 탓하랴! 이런 말할 자격도 없으면서. 탓할 필요성도 못 느끼고 해봐야 소용도 없다.
그래선지 나는 많은 이들이 안달나게 원하는 것들에 관심이 없다. 그런 것들로 나의 환심을 사려 한다면 나를 잘못 본 것이다. 얼마짜리 무엇, 유명한 어디, 다들 인정하는 그 자리. 이런 것들은 이제 나의 관심사밖으로 던져버렸다. 이 모두를 다 준다해도 결코 바꿀 수 없는, 바꿔서도 안되는 대명제를 나는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삶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나는 나를 제대로 살게 해주기로 나와 약속한 것이다.
나는 나를 더 크게 키워내어 더 제대로 쓰이게 하겠다고 우주와도 약속해 버린 것이다.
나는 나를 인공에서 자연으로 이동시켜 자연의 위대한 힘을 무한사용하도록 약속받은 것이다.
따라서, 내가 지금부터 집중해야 할 규정들은 다음과 같다.
나의 정신의 온도는 차갑고 명철하게,
나의 육신의 힘은 나약하지 않게,
나의 영혼의 기후는 맑게,
나는 나를 다듬어야 한다.
나와의 휴전을 끝내고 그동안 지배당했던 관성과 관념에서 벗어나 본성의 나와 지금의 나는 손을 맞잡아야 한다. 이러한 생이 얼마나 가치있는 삶인지 보여줘야 한다. 나의 자녀들에게. 나를 신뢰하는 나와 함께 공부하는 모두에게.
이러한 책임만 나는 나에게 부여할 뿐 더 큰 무엇에게로는 무책임하기로 했다.
위대해지지 않는 것으로 내 자신에게만은 위대한 자가 되기로 했다.
자기본능 위에 말뚝을 받고 그 자리를 지킨다면 온 세상, 온 우주가 나를 바라본다는 사실을 믿기로 했다.
나는 그렇게 나에게만 무한책임을 지울 것이다.
나는
부족한 나를 스스로 부여잡고 거대한 자연의 힘에 의지하여
나의 가치를 나부터 인정할 수 있도록, 나에게 먼저 인정받도록 나를 이끌 것이다.
사자가 초원을 누비며
벌이 꿀을 찾으며
민들레가 씨를 퍼뜨리며
강아지가 소심한 자욱으로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듯
나도 바닥부터 일군 내 삶의 터전에서
대자연의 장엄함에 그릇되지 않은 삶을 살아낼 것이다.
나는 나에게만 위대한 존재이면 된다.
나는 나에게 부여된 책임만을 받아들이면 된다.
나는 내가 부여한 책임 외의 모든 책임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