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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Mar 30. 2023

'하루살이'처럼 살길

엄마의 유산 17

매거진 [엄마의 유산]은 성인이 된 저의 딸아들을 비롯해 젊은 친구들에게 부족한 저이지만 무엇이든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제대로 남기고 싶어 시작한 매거진입니다. 기성세대로서, 어른으로서, 부모로서, 교육자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제대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성찰과 다소 부족한 저의 정신이지만 그들의 앞날에 기준이 되어줄 미덕을 정리하는 글입니다. 


매미와 모죽이야기를 몇번 들려준 적이 있을거야. 알에서 깨어난 매미는 땅속에서 무려 7년을 보낸 후 땅위로 올라와 한 여름만 보내고 죽지. 모죽이라는 대나무는 전혀 자라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5년 이상 땅속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 땅위로 쑥... 그 줄기를 하루 30cm이상씩 죽죽!! 자신이 가야할 곳이 여기야! 라고 보여주듯 하늘높은 줄 모르고 뻗어 올라가지.

이들의 땅속시간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아. 하지만, 이들은 없거나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키워내고 있었고 충분히 그 시간을 보낸 후 여름 한 철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대고 하늘높은 줄 모르고 마구 자신의 키를 키워내지. 


무서운 성장이고 

무서운 외침이고 

무서운 자기발현이야. 

말 그대로 '나 여기 있다!' 소리치는 것 같아. 


'내가 죽은 줄 알았지?' 

'내가 포기한 줄 알았지?' 

'내가 없어진 줄 알았지?' 

'내가 뒤돌아선 줄 알았지?' 

마구 소리치며 온 에너지를 쏟아내며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생에 

자기 존재를 

자기 색깔로 

자기 모습으로 

자기 자체를 세상에 우뚝 세우지.


시선을 저... 어기 큰 우주의 관점으로 옮겨볼까?

140억년도 더 된 영겁의 시간, 초신성, 빅뱅시대부터 오늘 이 시간을 통으로 보자구. 존재하지 않은 것 같지만 '나'라는 존재 역시 엄청난 시간, 유전과 진화의 힘으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을까? 그리고 100여년이라는(매미의 여름한철이 우리의 100년과 뭐가 다를까?)  시간동안 '나 여기 있소'라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맘껏 드러내는 것은 본능이자 숙명이자 소명이 아닐까?


이번엔 시선을 조금 좁혀서 너의 인생 100년만 볼까?

생을 마감하는 나이든 너는 너에게 뭐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넌 진짜 너의 삶을 살았구나'라고? 

'넌 죽은듯이 살았구나'라고? 

'넌 남의 삶을 대신 살아줬구나'라고? 

'넌 인간답게 살았구나'라고?

'넌 짐승처럼 살았구나'라고? 

어떻게 말해주고 싶니?


여러발 달린 벌레부터 다리없는 미생물까지 '자기만의 인생'에서 '자기 존재가치'를 지닌 채 '자기'답게 사는 것은 분명 본능이면서도 '세상의 조화를 위해 그렇게 존재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란다. 두 발로 당당히 서서 앞을 보고 걸을 수 있도록 세팅되어 지금, 여기, 그 자리. 에서 우리 각자는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발현하고 있을까? 

내 삶을 사는 것일까,

남의 삶을 사는 것일까, 

내 삶이 시드는 것도 모르는 것은 아닐까,

내 삶의 시간이 그저 생명연장에만 쓰이는 것은 아닐까,

내 삶의 모양새가 그저 동물처럼 먹고 자고 싸고 놀고 쉬고로만 구성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엄마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묻는 자기의문이 인간개체인 각자에게 너무나 중요한 질문이어야 한다고 봐. 

의문의 물음표를 스스로에게 질문으로 던져 자기 안에서 해답을 찾아가는, 

그렇게 자기실현을 이뤄가는 여정이 인생이란다. 

자기여정을 자신의 존재가치가 우주의 조화에 합당하게 사용되도록 시간을 조절하는 자,

자기여정을 자기만의 자체목적을 위해 무상으로 주어진 모든 자연을 이용할 줄 아는 자,

자기여정을 자기실현이라는 목표를 향해 묵묵이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갈 줄 아는 자,

자기여정을 남이 아닌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서 자기색을 채색할 줄 아는 자.


엄마의 바람은 그럴듯한 명함을 위해 너의 인생을 몽땅 허비하기보다 

너만의 인생을 

너의 보폭으로 

너의 시선으로 

너의 길을 걸으며 

너 자체가 명함이 되는, 그런 삶을 네가 살아주길 바란단다.


세상은 다양성을 원하지. 

다양성은 조화를 위해 요구되지. 

다양하다는 것은 개체의 독창성이 존재할 때 가능하지.

개체의 독창성은 개체가 자기만의 색을 뿜어낼 때 비로소 만들어지지.

너라는 개체가 너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지.


즉, 자기 삶을 사는 사람은 세상이 원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기에

세상은 이로운 개체를 결코 소멸시키기 위해 괴롭히지 않아.

자기 삶을 사는 이기가 결국 커다란 이타가 되는 것이야.


매미가, 모죽이, 그리고 네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어. 매미와 모죽이 수년(100년 사는 인간이 계산한 5년과, 한여름 사는 매미에게 5년은 인간의 수백, 수천년과 맞먹는 시간이야) 을 땅속에서 하루하루 자신만의 본체를 드러내기 위해 치열하게 자신을 키워내듯 너 역시 하루하루 자신만의 시간을 만들줄 알아야 한단다. 이는 애벌레가 매미가 되고, 모죽이 그 엄청난 속도로 자신의 줄기를 키워내듯 너 역시 하루하루의 보이지 않는 변화가 엄청난 질적승화라는 화학반응을 일으켜 '너'를 본능을 탑재한 본체로써 세상에 드러나게 한단다.


매일매일이 그저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하루라는 생각은 이제 버려라. 

엄마는, 그리고 너는 오늘 하루 살아났단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없이 새로운 하루를 얻지 못하고 죽어감에도 

우리에게는 또 '하루'라는 선물이 주어졌단 다. 

왜? 

죽일 수도 있었을텐데 왜 살려놨을까? 

네가 쓰는 하루가 세상에 이롭기 때문이겠지. 


'하루가 모여서 인생이 된다'는 이 당연한 사실을 진리로 승화시켜봐. 

하루는 그저 숫자에 불과한 시간이나 생명연장에 불과한 삶이 아니라 너 자신의 자체목적을 만들어가는 소중하고도 귀한, 그러면서도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단 한번뿐인 시간이야. 오늘 하루, 그리고 지금이 가장 귀한 시간이라고 여기며 시간을 보내봐. 


먹는 것 하나, 

노는 시간 하나, 

내 눈에 들어오는 무엇 하나, 

내 발이 닿는 그 어떤 곳하나, 

내가 읽는 책 한줄, 

내 앞에 있는 한 사람,

내 귀에 들리는 한마디 말, 

네 머리카락을 날리는 바람한줌, 

모두가 다 너를 위해 존재하는 귀한 것이 된단다. 


노는 것도 아니고 하는 것도 아니고

듣는 것도 아니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가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주는 것도 아니고 받는 것도 아니고

이도저도 아닌 것들로 온통 네 시간이 도배되게 하지 말거라.


큰 꿈은 꾸지만 하루하루를 이도저도 아니게 보내는 사람은 말 그대로 허상가이자 망상가란다. 

될 것 같은 감정에만 사로잡혀 있지 되게 하려는 의지는 박약한, 그래서 나태하고 미련한 사람이란다.

감정이 이성을 지배해버린 결코 자기자신도 자신을 이겨내지 못하는,

의지할 누군가만 찾아다니는 것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그런 인생을 사는거란다.

하루하루를 제대로 살지 못하면 

너의 꿈은 결코 너를 견인하지 못하고 다른 주인을 찾아 떠난단다.


'하루'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어찌 '인생'의 가치를 알까.

'하루'의 시간이 '영원'임을 모르는 사람이 어찌 '시간'의 귀함을 알까.

'하루'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어찌 '목적있는 삶'을 살아낼까.

'하루'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변화의 영속성'을 이해할까.

'하루'의 목표가 없는 사람이 어찌 '자기색'을 가질 수 있을까.

'하루'의 우선된 행동이 없는 사람이 어찌 자기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하루'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이 어찌 '타인의 소중함'을 알 수 있을까.


'하루'라는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하루'를 응당히 자기몫으로 주어진 것이라 여기지 않아. 

감사로 하루를 시작하지. 

이런 사람은 그 하루라는 선물에 대해 해야할 것, 가야할 곳, 줘야할 것, 들어야 할 것, 봐야할 것, 읽어야 할 것, 버려야할 것, 익혀야 할 것을 대가로 지불할 줄 안단다. 

이것을 한마디로 '행동'이나 '실천'이라고 말하는거야.

목표를 위한 행동이 없는 하루는 소모의 하루이며

목표를 향한 행동이 있는 하루는 투자의 하루란다.


목적성을 지니고 사는 삶, 이유를 알고 사는 삶, 가야할 길을 걷는 삶을 사는 사람은 그래서 단순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야. 이게 맞나, 뭘 해야 하나, 저 길이 더 좋을까, 남들은 왜 저럴까로 시선이 분산되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오늘 해야 할 행동, 지금 주어진 무언가로 하루를 보낼 수 있지. 기웃거릴 시간도 간섭할 에너지도 필요없다는 것을 알지. 그저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사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기에 말 그대로 '쓸데없는' 것에 치여살지 않게 된단다.


하루살이처럼 살아라.

오늘 하루가 너의 인생이란다.

오늘 하루자 전체를 시작하는 날이란다.

지금 네가 서 있는 그 자리부터 정돈하고 걸으면 된단다.


결코 하루를 미친듯이 바쁘게 살라는 말이 아니란다.

전체를 염두에 두고 오늘 당당히 하루를 네 것으로 만들라는 말이란다.

외부로 향한 시선을 거두고 당당하게 너 자신을 믿어보라는 말이란다.

빨리 걸으라는 말이 아니라 함께 멀리 걸으라는 말이란다.

남의 길에 얹혀서 비위맞추고 타협하지 말고 너의 길위에서 놀라는 말이란다.


우주의 시선으로 너를 바라보고 너의 시력으로 눈앞을 쳐다보렴

세상의 소리에 귀를 열고 너의 귀에 들리는 것들을 낚아채렴

진리에 마음을 매어두고 너의 관념속 정신을 풀어내렴

이치가 내준 길을 따르고 사실에 의존해 걷는 너의 다리를 멈추렴


전체의 시각에서 부분을 이해하고

일체된 통합에서 독창을 드러내며

목적된 길위에서 목표에 달려가고

진리의 이치에서 사실을 의심하고

인생의 큰틀에서 하루를 살아가렴


이렇게 하루를 보내는 사람은 퇴계가 말씀하신 

달리는 말 위에서도 개미집을 볼 수 있는 '경(敬)'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야.


오늘 이 글은 폴란드로 연주를 떠난 딸아이와 미국에서 자신의 목표를 향해 고군분투중인 아들과

저와 함께 새벽독서를, 글쓰기를 하고 있는 모든 20대 청춘들에게, 저의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들의 자녀들에게 바칩니다....

나의 이런 견해와 주장이 그들에게 결코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는 어른들을 그들은 늘 접하고 있으니까요. 사랑합니다... 당신들의 지금을, 그리고 지금으로 만들어질 미래를 항상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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