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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Apr 22. 2023

무료하다면, 마음이 힘들다면...

'고통'에 대한 소고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행복을 저해하는 큰 2가지가 있다면 '고통'과 '무료함'이라 했다. 

'고통(苦痛)',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 

무료함 역시 마음이 괴로운 것이니 고통의 일부라고 할 수도 있겠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가진 경제적인 부로 인해 다소 난잡한 생활을 한 철학자로 인식되며 그의 글이 주는 신뢰에 약간의 먹칠을 당하기도 하지만 나는 이러한 그의 정신세계로 인해 그의 철학이 내게 더 실제적으로 와닿는 것을 감사히 여긴다. 삶의 괴리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정신의 부를 추구하는 평생을 살았을까. 싶기 때문이다. 


감히 그 고통을 조금은 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그가 나와 같은 나이를 보내면서 그간의 인생을 통해 철학적 신념의 글들을 적어나갔다면 나 역시 당시의 그와 비슷한 나이를 보내면서 나의 철학적 소견을 적는 것에 약간의 자신을 가져도 좋으리라. 


고통스럽다. 는 무언가가 부족하다, 빈곤하다는 의미이다.

마음에, 정신에, 정서에, 육체에. 

나의 것들에게서 빈곤을 느낄 때 '너 빈곤하구나'라고 보내주는 감각이 바로 고통의 느낌이다.


이러한 고통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쇼펜하우어의 표현대로 '정신의 부'를 쌓는 것이다. 

이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공감한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호소하지만 상담이나 약으로 없애려하지 '공부(책등)'를 하지 않는다.

유일한 처방인데 자꾸 외부에서 가해지는 빠른 비법만을 찾아다닌다. 결국 이들의 고통은 줄어드는 듯하지만 더 큰 고통으로 그들을 압박한다. 그러면 더 센약, 더 긴 상담으로 그들은 자신을 이동시킨다.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줄도 모른 채 말이다.


고통의 최대처방은 '정신의 부'를 쌓는 것이라는 사실은 독서+코칭을 병행하는 나와 함께 하는 이들의 변화를 통해서 충분히 검증되고 있다. 육신의 고통이야 의학적인 처방이 있겠지만 정신과 정서의 고통에 있어 '정신의 부'를 쌓는 것이 가장 지름길임을 나는 경험을 통해 체감했고 현재 진행하고 있는 독서+코칭을 통한 타인의 경험까지 보태어져 나의 확신은 더욱 공고해졌다. 아마 이 확신에 고개를 끄덕일 이들이 많을 것이다.


자, 하나씩 풀어보자. 왜 정신의 부가 고통의 처방인지에 대해. 

정서의 빈곤은 정신의 줄기로부터 전해진다. 정서가 고통스러울 때 개인의 뇌를 들여다보면 아마도 빈 공간이 있거나 어떤 틈새가 생겼거나 서로의 연결이 부자연스럽거나 억지스럽게 이어져있는 경우일 것이다. 가령, 열심히 살고 있으나 행복하지 않다거나 결과를 위해 뛰었지만 허무하다거나 많이 배웠는데 난처하다거나 이런 경우가 그렇다 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감정은 감각으로부터 비롯된다. 우울해서(감정) 바다를 보러 가면 바다의 내음, 지평선, 푸른 빛, 발바닥에 닿는 모래, 파도소리, 바닷바람 등 모든 오감을 자극하는 것들로 내 마음은 이내 따뜻해진다. 산을 올라도 그렇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감각'을 자극하기 위해서다. 


감각이 가슴에 닿는 정서가 감정, 

감정의 움직임이 감동,

감동의 움직임이 없는 상태가 우울이고 무료함이고 허무함이다. 


가슴으로 들어오는 것이 없을 때 공허와 허무가, 

들어온 것이 약할 때 무료가, 

무료가 지속되거나 나쁜 것이 들어와 쌓이면 우울이, 

이 정서가 고착되면 극심한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이고 이 감정이 강도가 세지고 넘쳐서 정신으로 역행하면 정신적 질환이, 이 질환이 심해지면 화병과 같은 육체의 질병이 된다.

자, 다시 말하지만 모든 감정은 감각으로부터다. 


지각 역시 마찬가지다. 감각이 느껴질 때 감동이 찾아오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뇌에 입력이 된 것이 지각이다. 아. 푸른 바다를 보니 내 심장이 뛰는구나. 아~ 저런 사람을 만나니 내 기분이 우울해지는구나. 라고 감각-감정-감동의 연합을 머리로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이 암묵적 지식, 즉, 지각활동이며 이 지각의 경험의 누적과 고착이 관념이다. 아~ 저런 사람을 만나면 우울해지니 저런 류의 사람은 안 만나야겠다. 라는 암묵적 지식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이 고착되면 편견, 선입견이 되니 편견과 선입견이 무조건 나쁘다기 보다 고정된 것이니 나의 새로운 감각을 저지시키거나 훼방놓는다는 차원에서 편견과 선입견은 경계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고통, 즉, 감각은 지각활동에 긴밀한 연관을 지니게 되므로 '정신의 부'가 풍부할 때, 정신이 더 질서가 잡혀 있을 때 덜해질 수 있는 것이다. 

고통스러우니(감각) 피해버리는(감각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각작용이 일어나는 정신을 더 풍부하게 하기 위한 

새로운 감각활동을 조금 더 늘여보면 분명 고통의 통증은 줄어든다. 

다양한 감각의 투입은 다양한 감정으로 교란되며 

혼란을 초래하더라도 새로운 감정을 생산하게 되고 

이들의 새로운 운동(감동)이 

또 새롭게 나의 지각의 변화를 일으키면서 

나는 새로운 나로서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마찬가지로 지각이 먼저냐 감각이 먼저냐는 상관없다. 정신의 부를 쌓는 독서와 같은 행위자체가 분명 새로운 감각을 자극한다. 책을 읽으면 분명 눈의 감각, 뇌의 감각이 자극되고 이는 나의 정서로 직결, 감정을 일으키고 감정을 움직(감동)인다. 움직인 감정은 이성으로 직결, 기존지식에 새로운 자극을 주어 지각을 변화시킨다. 머리가 달라지니 행동도 달라지고 현상을 이해하는 수준도 달라지고 달라지는 이 약간의 차이가 새로운 감각-감정-감동-지각-행동의 연쇄를 새롭게 이끄는 것이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려 하나 인체 자체는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나의 인체는 어딘가로 성장을 하기 위해 간다. 그런데 내가 감각을 닫고 외부의 약에 의존해 더 감각이 닫히는 줄도 모른다면 이는 인체의 성장에 위배되기에 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물론, 경중에 따라 약이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아. 해봤자 뭐해, 하기 싫어'. 우리는 감동의 순차적 연쇄에 의해 뭔가를 내게 지시하지만 

약한 이성은 이를 통제한다. 정신이 빈곤한 자이다. 

정신의 부가 쌓이면 감정이 치고 올라와도 이성이 감정을 이긴다. 

영혼이 나를 끊임없이 자극하나 나의 이성이 빈곤하여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런 이는 영원히 살아있는 감각으로 인해 감정만 세게 흔들려 더 강해질 뿐 결코 머리와 다리를 옳은 방향, 인체의 성장방향으로 이동시키지 못한다.

정신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가장 기본적인 활동인 것이다.


코칭을 원하는 이들에게 달콤한 말, 그럴듯한 행동제시를 결코 하지 않는다. 

딱! 지금! 이 순간! 지식의 틈새를 채워줄 책을 읽게 하고

지루하고 긴 시간이지만 기본부터, 땅부터 고르게 제안한다.


우리는 너무나 내 육체의 연동을 몰라서인지 알면서도 귀찮아서인지 이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몸이다. 

자신이 운용의 주체다.

자신밖에 알지 못하고

자신만이 키울 수 있다.


공허함, 우울감, 허무감, 무료함... 

이러한 감정들은 감각-감정-감동-지각-실천의 연결이 어긋난 것이니 

이들이 가는 길을 잘 뚫어주면 반드시 해결된다.


* 쇼펜하우어 인생론, 쇼펜하우어, 2010, 나래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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