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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Apr 27. 2023

단 한 사람의 손만 잡으면 되는 것을....

'우주'에 대한 소고

우리는 하루에 수많은 형용사를 불러온다.

좋아요, 싫어요, 예뻐요, 미워요, 단단해요, 약해요, 어려워요, 쉬워요, 떨려요, 두려워요, 단아해요, 어지러워요, 혼란스러워요, 사랑스러워요, 난처해요, 행복해요..... 등 하루에 내가 표현하는 이 많은 언어들 가운데 절반이 형용사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형용사는 '비교'에 의해 존재하는 언어의 묶음이다. 예쁘다가 존재하려면 그 예쁜 존재보다 더 또는 덜 이쁜 존재가, 좋아요를 말하려면 그보다 더 또는 덜 좋았던 기억이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덜 귀한 것을 보았기에 지금 보는 것이 귀하게 보이고

더 착한 것을 알았기에 지금 행하는 것이 덜 착한 것이고

덜 두려웠기에 지금 하려는 것에서 더 두려운 것이다.

이렇게 형용사는 지금 나의 감정수준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나의 감각과 감정과 정서의 수준을 대변한다. 따라서, 나는 나를 내 혀의 소리를 통해 제대로 알아낼 수 있다.


그렇다면, 형용사로 표현되는 나의 감정은 기준이 나의 과거에 기인한다고 해도 무방할 듯 하다. 나의 과거 속 기억. 기억속 누구, 누구와 함께 한 어디, 어디에 존재했던 무엇, 무엇으로 느꼈던 그 감정. 즉, 기억속을 헤집어서 누구랑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왜 했는지가 내 현재의 비교대상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될 수 있을 듯 하다.

첫째, 더 크고 강렬한 느낌을 가지려면 과거 기억속의 수준이 높아야 한다. 

둘째,  나의 감정언어인 형용사는 기억에, 감정에 의존하기에 객관적이기보다는 상당히 주관적 해석일 가능성이 높다. 

셋째, 인간은 기억을 지우려 하고 더 나은 기억을 원한다고 할 수 있다. 더 이쁜 것, 더 좋은 것, 더 두렵지 않은 것, 더 고상한 것, 더 아름다운 것, 더 편안한 것, 더더더더 진한 감동을 기억에 남기려 한다. 역시 인간은 추구의 동물이다.


나는 형용사에 매달리기로 했다.

내 입에서 아~ 이쁘다, 아~~ 아름답다, 아~ 편안하다, 아~ 행복하다가 연발되도록 나는 나에게서 튀어나오는 형용사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꽃을 보면서 아~ 이쁘다. 분명 이 꽃은 어제도, 그제도, 작년에도 있었는데 오늘 보니 더 이쁘다. 꽃은 변하지 않았는데 내가 깊어졌다.

사람을 보면서 아~ 아름답다. 분명 이 분은 어제도, 그제도, 며칠전에도 울었는데 오늘 보니 이 눈물이 너무 아름답다. 눈물은 그대로인데 내가 더 깊이 들여다봤다.

밥을 먹으며 아~ 감사하다. 분명 밥순이인 나는 수시로 밥을 먹는데 오늘 밥은 더 맛나고 더 감사한 맘을 불러온다. 밥은 그대로인데 이를 대하는 내 마음이 감사로 향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게서 나는 형용사를 끄집어내며 매번 놀란다. 내가 이렇게 많은 형용사들을 사용하고 있었다니... 나는 나의 감동에 감동한다.


꽃, 사람, 밥,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사태들, 즉, 명사와 동사들은 형용사를 위해 존재하는 하수인으로 신분을 바꿔버렸다. 그들에게 붙여진 그 이름들에서 나는 깊이 있는 감정을 드러내어보고 그 감정이 나의 정서에 고이 간직되길 바라며 이를 기억하는 지각으로 귀하게 옮겨본다. 나의 기억에 조금 더 형용사의 범주와 깊이의 수준이 고상해짐을 느낀다. 

 

무한의 의미를 품은 형용사를 내 것으로 가지기 위해 유한한 범주의 명사의 삶을 사는 나로 나는 하루를 보내보기로 했다. 1일, 24시간 이라는 유한의 명사 앞에 나의 형용사는 무한한 범주에서 무한하게 넓고 멀고 깊게 퍼질 수 있다. 


가치를 위해 일을 하고

행복을 위해 시간을 쓰며

아름다움을 위해 관계가 필요하고

숭고함을 위해 책이 요구되고

본질을 위해 명함이 존재하고

경이로움을 위해 사태와 사물이 존재한다.


이제부터 

일을 위해 가치를 위배하고 시간을 위해 행복을 미루고 관계를 위해 아름다움을 져버리고 책의 글자가 주는 지식에 의존해버린 채 숭고한 사상이 희석되고 명함을 위해 본질을 외면하고 사람을 옆에 두기 위해 경이로운 나를 버리면 안되겠다. 


목적(형용사)을 향해 수단(명사)이 존재해야 하는데

수단을 위해 목적이 외면되는 삶.

말로는 더 나은 삶을 원한다 하면서 실제 행동은 일하느라 너무 바빠 자신에게 시간을 주지 않는다.

외양으로는 충분히 열심히 산 듯하지만 글쎄. 목적과 가치가 계속 외면되면 '열심히'는 오히려 나태함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최근의 나는 더 형용사에 집착하고 형용사를 깊이 느끼기 위해 하루를 산다. 나는 정말 가치있는 삶을, 의미있게 걸으며, 아름다운 나로 살고 싶다. 아니, 그리 살기로 한다. 나의 배움이, 건강이, 언행이, 정신이, 감정이, 영혼이. 나의 모든 것들이 모두에게 이롭게 쓰이면 그런 삶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어떻게? 내 현실을 보니 까마득하다. 나같이 별 것 아닌 사람은 전체를, 인류를, 행복을, 보편을, 교육을 위해 뭘 하나도 해낼 능력은 없다. 이미 나는 나를 잘 안다. 못할 것이고 능력도 여기까지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면 되지 않을까?

여럿이 아닌, 단 한사람의 손만 잘 잡고 그 한사람에게 진심을 다하고 그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해 내가 옳은 방향을 걸으면 어떨까? 

내 손을 잡은 그 상대도 또 한사람의 손을 잡고 그 한사람에게 진심을, 행복을, 보여주는 실천을, 그리 옳은 길을 걸으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잡은 손이 이어지면 되는 것이 아닐까?


각각의 지식과 일과 환경과 손잡은 이는 다르지만, 즉, 명사는, 유한한 것은 다르지만

이 잡은 손들이 유한한 것을 너머 무한한 경지를 품은, 형용사를 추구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니 지금 나는 내가 손잡은 그 상대를 위해 나를 감싸고 지배하던 부정형용사를 지워나가며 새로운 형용사로, 더 크고 넓어 깊어진 형용사의 자신으로 다시 물들이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나에게 물든 내 손 잡은 이가 그렇게 자신의 손잡은 이에게 또 물들이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옆으로 옆으로 옆으로... 그러다 저~~ 어기 어딘가에서 나의 빈 왼손을 잡아줄 누군가로 연결되어

우리는 하나의 커다란 원으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나와 같이, 어느 누군가도 언제부터인가 어딘가에서 만들고 있지 않을까?

이렇게 원과 원들이 다시 어떤 접점에서 만나게 되면 

우리는 하나의 커다란 구(球)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이미 내 시야밖에서 큰 구(球)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나는 이제 원 하나 보태려 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이것이 '내가 우주의 중심'이 되는 그 원리가 아닐까?

어쩌면 이것이 전체의 조화를 위해 딱 내 자리를 지켜내는 힘이 아닐까?

어쩌면 이것이 일체( 一切)를 위한 다양한 개체로서 나를 존재시키는 덕(德)의 실천이 아닐까?


이러니 쉬워졌다.

나는 나에게만 집중하면 된다.

이러니 장엄해졌다.

커다란 구를 향해 시작한 작은 원 하나.

이러니 위대해졌다.

장엄한 구를 위한 미약한 나이지만.

이러니 가슴이 터질 것 같다.

내가 손잡은 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이러니 나는 나의 가치를 상승시킬 수밖에 없다.

내 손잡은, 내 빈 왼손 잡아줄 그 이들을 위해서.


유한한 지식을 너머 무한한 지혜로

닫혀진 내 정신을 너머 열려진 사유로

정해진 내 보폭을 너머 한계없는 길위로

나는 나에게 집중하여

나의 아름다움을

나의 숭고함을

나의 고귀함을

나의 사랑과 행복과 기쁨을 더 키워내면 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명사를 추구하며 입은 옷을 과감히 벗고 형용사의 옷으로 갈아입으면 되지 않을까?

이것이 소유의 추구에서 존재의 추구로 나아가는 길이 아닐까?

나의 존재가치를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결국 모두를 위한 이타의 실천이 아닐까?

명함을 위한 삶이 아니라 명함을 버릴 줄 아는 삶으로 가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나는 이 새벽.

내 손잡은 이를 위해 

나에게 또 더 깊게 집중해본다.

내 손잡은 그도 그럴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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