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대한 소고
나는 볼수도 만질수도 가질수도 옮길수도 늘일수도 줄일수도 키울수도 조절할수도,
그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묵묵히 내 속도로만 움직인다.
골리앗이 아무리 센 힘으로 나를 밀어도
아인슈타인이 아무리 뛰어난 머리로 나를 이기려해도
소크라테스가 아무리 특유의 언변으로 나를 설득하려 해도
나는 결코 보폭을 조절하지 않는다.
제 아무리 엄청난 사건사고가 세상을 놀라게 해도 나는 제자리에서 동동거리지 않으며
제 아무리 불행한 일로 통탄하는 이가 있다고 해도 나는 눈꼽만큼도 동정하지 않으며
제 아무리 극악무도한 짓을 하거나
천사같은 행위로 모두를 이롭게 하는 이라도 더주거나 덜주는 법이 없다.
나는 예외없이 모두에게 공평할 뿐이다.
나는 사람과 사람사이를 헤집으며 그들의 관계에 관여하고
사람의 정신을 과거와 미래로 이동시켜 그들을 통찰하게 하고
길가에 못난 잡초에도
첨단을 자랑하는 우주선에도
나는 태양의 뜨고 지는 대법(大法)의 속도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내 눈은
늘상 다른 이들과 비슷한 것들을 보여주지만
시간의 눈은
같은 자리에 서 있다 하더라도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초인으로서의 나를 발견시켜
정신에 개입된 시간의 누적만큼 현상을 발가벗겨 그 이면까지 나에게 보여준다.
시간의 개입은
관계속에서 끙끙대는 갈등을 말씀하게 씻어내어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기도 하고
때를 벗겨낼 때가 된 관계는 인생에서 사라지게도 한다.
시간이 사물과 결합할 때엔
시간의 함량을 감사히 여기는 이에게는 그것의 가치에 무한의 시간인 영원을 선물하지만
시간의 함량을 무시하는 이에게는 냉정하리만큼 모든 걸 무가치하게 빼앗아간다.
시간이 무시해버리는 대상은 사물이 아니라 자신이 되어 버린다.
알랭드보통이 그의 저서 '행복의 건축'에서
협곡과 협곡사이를 가로지르는 다리에서 시간의 위업에 감탄하며 표현했던 것처럼
시간은 '마치 신들이 허공에서 떨어뜨린 것 같이'
이쪽과 저쪽을 연결지어 내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시력(視力)이 시력(時力)으로 승격(昇格)되지 않는다면
즉, 단지 보이는 현상만으로 살아가려면 세상살기가 어지간히 버거울 것이다.
하지만,
오롯이 주어진 시간을 내 인생에 충분히, 아주 깊숙이까지 침투시킨 이의 인생은
어떤 과장과 겸손, 저항이나 배려가 없더라도
향이 풍기고 기운이 추가된다.
부지런과 시간은 상관이 있을까?
나는 상관관계는 있겠지만 굳이 연관짓지 않아도 된다는 견해를 지닌다.
시간은 부지런하든 나태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기에
누가 자신을 어떻게 사용하든 개의치 않는다.
초점은 시간에 있지 않고
나에게 있다.
나의 생활을 조금 드러내보자면,
나는 시간과 내가 만나는 특별한 지점을 따로 정해놓는다.
에머슨을 읽는 수동적인 나는
시간을 불러들여
그에게 우격다짐하듯 '당신이 스웨덴보그를 통해 배운 그것을 나에게도 알려달라'고 한다.
어떤 때엔 에머슨 손을 잡고 스웨덴보그를 만나러 간다.
데이빗소로우처럼 살다가 몽테뉴처럼 늙어가고 싶어
시간에 다시 응석을 부렸더니
내 시력(視力)을 차단한 채
승격된 시력(時力)으로 날 그들에게 데려가주었다.
정말 '신이 허공에서 날 떨어뜨리듯이' 말이다.
또 때로는
소크라테스의 재판과정에 배심원으로도 참여해보기도 하고
케인즈와 러셀, 버지니아 울프가 토론하는 그 현장에서 진땀 흘리며 앉아있어도 보고
네로 앞에서 세네카를 대신해 항변하기도 하고
코스탈로니나 벤자민 그레이엄에게 투자의 비법을 알려달라고 조르다가
성에 안차면 워렌버핏, 짐로저스를 찾아가기도 한다.
여기와 다른 차원에서 그들과
차마시고 대화하며 배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간은
물리적인 차원을 초월하여 나를 이리로 저리로 데리고 다닌다.
시간의 손을 꼭 잡고 있으면
플라톤의 이데아를 직접 그의 묘사로 들을 수 있고
에머슨의 자본주의에 대한 통찰을 노트할 수 있으며
궁수의 모습을 그리는 파올로코엘뇨를 옆에서 지켜볼 수 있고
사아디의 우화 속의 그 맨발을 직접 만져볼 수도 있다.
나폴레온 힐의 연설장에 내가 청중으로 자리할 수도 있고
마르쿠스아우렐레우스가 도대체 명상록을 어떻게 집필했는지 옆에서 살펴볼 수도 있으며
귀곡자를 만나 직접 그의 처세술을 전수받을 수도 있다.
달력에 매겨진 연수(年數)나
핸드폰에 자리차지하고 지속적으로 변해가는 숫자와 무관하게
나는 차원을 넘나들며 시간을 아끼지 않고 사용하는데 부지런을 떤다.
내가 개미처럼 잠자지 않는 생명체도 아니기에
어쩔 수 없이 잠이 든 그 때에도
시간에게 내 곁에 머물러 달라고 애걸한다.
나와 책 사이에 시간을 투입시킨 후
무릎을 딱 치는 그 순간에 시간의 손을 잡고
나에게 섬광이 느껴질 때 시간에게 감사하며
시간을
그렇게 내 곁에 항상 붙잡아둔다.
시간이 나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간을 움직인다.
나의 시력(視力)이 시력(時力)이 되고
이 시력(時力)이 지력(知力)으로 승화될 때
나는 내가 원하는 어떤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든
항상 존재할 수 있음을 안다.
이 연결의 훌륭한 조력자가 책이며
책속으로 시간을 불러들이는 순간,
나의 정신이 초월된 이성과 손잡고
마법을 부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