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사람들이 최고로 뽑는 자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경청'이다. 일단 잘 들어보자는 것이다. '말'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표현이기에 '경청', 즉 '말을 잘 들어주는 자세'야말로 그 사람의 표현에 대한 존중인 것이다. '경청'의 중요성에 대해 굳이 나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 상식이니까.
그런데 나는 이 지면을 통해 '경청'에 반기를 들려 한다.
과연 우리는 진짜로
'잘 들어야 할까?',
'귀담아 들어야 할까?'
말 잘 들은 헛똑똑이들의 시대.
2011년 1월 23일, 미국의 유명잡지 '컨슈머리포트'에 '21세기에 해서는 안되는 나쁜 금융교육 5가지'가 발표됐다.
첫째, 검소하게 살아라.
둘째, 예산을 세우고 수입의 일정부분을 퇴직연금에 가입하라.
셋째, 저축하라.
넷째, 부채(빚)을 없애라.
다섯째, 가능한 오랫동안 일하고 늦게 퇴근하라.
여기까지 읽고서 '난데?' 싶어 놀란 이들이 많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나도 그랬다. 주변 어른의 말씀들, 교과서 위주의 지식들로 무장된 '바람직한, 모범적인, 착한' 아이들은 아마 이런 습관이 몸에 배어 있을테고 이들 대다수는 '대학'에 가서야 '내가 여태 뭘 배운거지? 내가 잘못한 게 뭐지? 난 시키는대로, 배운대로 했는데!' 라며 깨닫기 시작한다.
열심히 저축했지만 화폐가치는 바닥을 뚫고 내려간 마이너스 금리시대, 결국 열심히 모아놓은 돈은 시간의 함수 속에서 오히려 더 손해를 보게 되었고 열심히 누구보다 늦게까지 일했지만 월급이 오르는 속도는 물가상승 속도를 따라잡기는 커녕 뒤쫒지도 못한다. 빚없이, 카드없이 알뜰살뜰 현금으로만 생활했더니 '부자아빠 가난한아빠'의 저자 '로버트기요사키'는 '좋은 빚'을 내라고 오히려 독려한다.
금융교육뿐만 아니다.
직업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곳에 취직하는 것이 인생성공의 비결이라고 여기는 이는 이제 없다.
지금 온 나라를 뒤흔드는 '자산열풍'이 이를 대변한다. 평생 9번 이직을 하는 시대, 한번에 여러 직업을 가진 N잡러 시대. 오히려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학교를 등진 이들이 승승장구 성공하는 걸 바로 면전에서 배알이 꼴려도 봐줘야 하는, '착하게 열심히' 살아온 이들이 배신감을 충분히 느끼게 되는 그런 시대가 됐다.
우리는 부모와 선생의 말을 잘 듣는, 공부 열심히 하고 아껴쓴 착하고 모범적인 헛똑똑이가 된 것이다.
삶보다 앎에 치중했던 시간들의 결과
교실에서는 모든 것을 훈련받고 배울 수 있지만 정작 삶의 기술은 배울 수 없다.
거기서는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법은 가르쳐도
육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화학은 공부해도 빵굽는 법은 배우지 못하고
기계학은 공부해도 빵을 버는 법은 배우지 못한다.
혜왕성의 새로운 위성을 발견하는 법은 배워도
제 눈 속의 티끌은 보지 못하고
자기가 지금 어떤 악당의 위성 노릇을
하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한다.
식초 한 방울 속에 우글거리는 괴물들은 연구하면서,
주위에 우글거리는 괴물들에게
자신이 잡아먹히고 있는 줄은 알지 못한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
정작 배워야 할 '삶'보다는 '앎'에 치중했던 시간들 속에서 지혜의 철학자 '발타자르그라시안'이 말한 교육의 목적을 간과한 것이 아닐까? '두뇌의 훈련'말이다. 생각하지 않은 채 받아들이고 그대로 따른 것에 대한 결과를 우리는 지금 자신의 삶을 통해 통렬하게 깨닫고 있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듣고 누구를 따라갔던 것인가?
내 주변의 간섭주의자는 누구일까?
이에 대해 니콜라스나심탈레브는 '간섭주의자'라고 불리는 이들을 조심하라고 했다.
간섭주의자란
어떤 상황의 당사자가 아니라서
직접 참여하거나 아무런 책임을 질 일이 없음에도 해당 상황에 대해 잘 안다고 착각하여
개입하고 나서서 결국 문제의 취약성만
유발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게다가 이들은 인간적인 매력도 없다.
이런 간섭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 있다.
바로 현장경험이 결여된 '책상물림'이라는 점이다.
간섭주의자들은 생각이
단편적 수준에 머물러 있고
행동의 상호작용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는,
바보들이 범하는 오류인데도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루려 한다.
문제는 다차원적인데
자신의 해석은 일차원적이다.
- 니콜라스나심탈레브, 스킨인더게임 -
자신의 주변에 간섭주의자는 널려 있을 것이다.
부모일수도, 선생일수도, 믿고 따르는 형일수도, 절친일수도 있다. 예의와 도덕을 강조하고 지혜보다는 지식의 양에 집착하며 도전보다는 안정을 추구하고, 특출난 것보다는 보편적인 것에 더 큰 신뢰를 주는 그런 이들 말이다.
이들과의 대화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청소년들의 필독서인 '프랭클린자서전'에도 이런 대화가 등장한다.
랠프는 시를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언젠가는 유명한 시인이 되어
돈도 많이 벌 거라고 장담했다. (중략)
오스본은 랠프에게
시에 소질이 없는 것 같으니 포기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나 매달리라고 말렸다.
계속 장사꾼의 길을 걷는다면
자본이 없더라도 부지런하고 꼼꼼하니
대리 경영을 할 수도 있고
차차 자기 명의로 거래를 틀 수도
있을 거라고 설득했다.
-벤자민 프랭클린, 프랭클린 자서전-
나는 지금 이 시대의 랠프인가?
설마 내가 오스본처럼 누군가에게 조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모가, 선생이 지금의 시류를 모르고 전체를 볼 수 있는 시야가 없다면 이런 대화를 마치 상대를 위한 조언인양 절실하게 진심담아 간곡히 말해주곤 한다(물론, 그들이 나쁜 의도를 가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은 대략 비슷하게 말을 꺼내어 설득한다. '내가 겪어봤는데 말이야.', '내 경험으로는', '누구누구집 아들이', '엄마 아는 누구가' ... 이 사람 저 사람을 한데 연결해 서술을 풀어가면 마치 그 사람들이 겪은 일을 나도 겪을 것 같은 이상한 신뢰가 내게 전해지면서 지금 내가 하려는 '그 일'이 마치 지옥으로 걸어가는 것은 아닐까 싶은 의구심까지 들게 된다.
여기서 묻고 싶다.
과연 이런 조언에 나는 경.청.해야 할까?
우리는 가끔, 아니 자주 에머슨의 말처럼 '예민하지도 깊지도 않은 사람들에게서 여러가지 귀중한 의견을 듣는' 일이 많다.
과연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일까?
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수많은 '조언으로 둔갑한 간섭'을 받아야 하고 그것이 조언인지 간섭인지 훼방인지도 모른 채 경청의 예의를 차리다가 자기 삶이 남의 삶으로 변질되어 가는 것에 어느 날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 통곡의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지금껏 해왔던 시간들을 차마 져버리지 못하고 가던 길을 마져 가는 사람이 대다수겠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며 주변의 조언에 귀를 막고 자기 길을 가는 (간섭자들의 표현대로) 무모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들어야 할 말을 제대로 듣기 위해
듣지 말아야 할 말에 귀를 막을 수 있는 용기
도전이란 원래가 무모한 것이다. 무모하다는 의미는 무계획적이라는 것인데 안가본 길이니 계획이 없을 수밖에, 추상적인 미래에 벌어질 일들이니 계획할 수 없을 수밖에.
이런 관점에서 무모한 것은 어쩌면 창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무모가 '내 맘대로'의 창의가 되느냐, 아니면 '내 마음 가는대로'의 창의가 되느냐는 한끝 차이다. 평소에 자신의 기본자세를 제대로 갈고 닦아오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깊은 사고를 지닌 이들에게는 '내 마음이, 내 내면이 소리치는' 그 길을 가는 창의가 되겠지만 막가는대로 살아온 이들에겐 말 그대로의 '앞뒤를 헤아리지 못하는 무모함'일 것이다.
경청해야 할 조언들과 경청하지 말아야 할 조언들을 해석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숙고를 해본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것이다. 무작정 말을 잘 듣는 것이 아니라 들어야 할 말만 잘 들을 줄 아는, 배워야 할 것에 당당히 무릎꿇고 순종할 수 있는 내면의 힘.
이런 이들이야말로 들어야 할 말을 제대로 듣기 위해 듣지 말아야 할 말들에 귀를 막을 줄 알며, 무릎꿇어야 할 그것에 무릎꿇기 위해 다른 길로는 발걸음도 주지 않을 테니까.
여하튼 무모한 이들에게 나는 희망을 주고 싶다. 100세시대다! 정말 자기 인생을 자기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오롯이 나로써 살 수 있는 기회는 무진장 널려 있다. 널려 있는 기회들을 내가 보고 잡을 수 있으려면 내 시야가 지금껏 가져왔던 것보다 더 넓어야 할 것이며 내 용기 또한 지금껏 발휘했던 것 이상이어야 할 것이다. 자신있다면 지금 이 글, 에머슨의 글을 읽고 또 읽고 심지어 외우도록 해보라.
분명 내가 나로써 살 수 있는 내면의 힘을 발견할 것이다.
인간에 대하여 이상한 희망을 품는 사람들을
말 못하게 하기 위하여
언제나 제시되는 그 논의,
즉, 경험에 호소한다는 것은,
영원히 무효이고 헛된 일이 된다.
우리들은 과거의 일은
반대자에게 내맡기면서도 희망을 계속한다.
반대자는 이 희망이라는 것을 설명해야만 한다.
- 랄프왈도 에머슨, 에머슨 수상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