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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차단, 감각오픈

ch1. 나를 해체해보니 1

by 지담

본 글은 제목도 미정이고 글도 다듬어지지 않았습니다. 출간을 염두에 두고 그저 써내려 가는 글이라 제목도 마음 내키는대로 그때그때 수정될 예정이며 당분간 -새벽독서로 깨달은(배운) 어떻게 살 것인가-로, 문제도, 어투도, 내용도 오락가락할 것 같습니다. 단편에세이가 아닌 글을 써내려는 과정에서 의례 겪어야 하는 수순이라 그대로 노출하는 용기를 내봅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글이라 외면마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글을 사랑해주시는 독자분들이라면 연재되는 글이니만큼 지난 1,2편과 이어서 읽으시길 권해드립니다. 또한 매일 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브런치발행은 매일 하지만 본 글은 매일 쓰지 못하며 띄엄띄엄 발행이 될 수도 있는 점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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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뇌아(無腦我)입니다.]

- 생각차단, 감각오픈


습관처럼 내뱉는 말이다. ‘나는 생각이 없다.’ ‘나는 그냥 한다.’ ‘나는 고민같은 거 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쓰일 뿐이다.’ ‘나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다.’ 실제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데 이런 말을 누가 듣는다면 ‘걔 바보아냐?‘라고 놀림받기 십상일 것이다. 아니면 정말 생각없는 인간취급을 받거나. 그런데 사실이 그렇다. 나는 생각이란 걸 할 줄 모르는 바보다. 뇌를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이제 없어져 버린 듯하여 나는 나를 ’무뇌아‘라 부른다. 나의 뇌는 소용있되 무용하다.


인간은 신체, 정신,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는 동물이다. 신체란 물질적인 몸이다. 정신은 보이지 않는 사고의 덩어리이며 영혼은 육신의 외부에 존재하며 나에게 세상의 신호를 알려주는 영적인 존재다.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익숙한 말처럼 이미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알고 있다. 신체의 힘보다 정신의 힘이 더 세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신체가 어떤 질병에 시달리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기 위해 애쓰지만 정신이 아프면 죽으려고 애쓴다.


물론, 신체, 정신, 영혼 이 셋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하고 어떤 것은 덜 중요하다고 감히 결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견줄 수는 없다. 어떤 것 하나만 없더라도 인간으로서 힘든 삶이 예상된다. 존재자체로는 중요성을 견줄 수 없지만 단, 많은 경험을 통해 신체보다 정신이, 정신보다는 영혼이 더 중요하게 기능한다고는 생각한다.


악마 3이 내기를 했다. 인간을 좌절시키기로. 1번째 악마는 신체적으로 해를 가했다. 팔다리를 없애고, 척추를 마비시키고. 그런데 인간은 신체가 몹쓸 지경에 들어서자 더 불굴의 정신력으로 자신의 능력을 배로 키우기 시작했다. 입으로 그림을 그리고 다리 하나로 산을 오르고 발가락으로 시를 썼다. 그래서 1번째 악마는 실패. 2번째 악마는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다해 천재지변을 일으켰다. 천둥 번개는 물론 쓰나미를 일으켜 온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하고 바이러스를 침투시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도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고도의 지식을 총동원하여 어떻게든 막아내는 것이다. 약물을 개발하고 과학기술을 이용해 물의 양을 조절하고 천재지변에도 끄덕 없는 건물을 지어냈다. 2번째 악마도 실패.


두 악마가 실패한 것을 보고 3번째 악마는 미리 쾌재를 외쳤다. ‘나는 시간이 좀 걸릴거야. 하지만 반드시 성공할 수 있어.’라고 장담한 후 한사람 한사람을 부지런히 쫒아 다니며 속삭이기 시작했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오늘 하루쯤은 쉬어도 돼.’, ‘이번 한번쯤은 괜찮아, 다들 그렇게 사는 걸 뭐.’, ‘너 하나 이런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아. 괜찮아, 아무도 몰라.’ ‘사는 게 별거야? 그냥 지금을 즐겨.’ 이 속삭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지금 잘 하고 있다는 착각의 그물에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악마의 속삭임은 너무나 달콤해서 한번 맛 들이면 결코 헤어 나올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그물속으로 들어가는 어리석음에 악마는 웃으며 자신의 승리를 확고히 했다.


속삭임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스스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무슨 목표야.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는 거지. 내가 뭘 한다고 되겠어? 그냥 나는 여기까지야.’ 라고. 스스로에게 한계의 문을 만들어놓고는 그 안에서 더 이상 도전과 시도 없이 자신을 가두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점점 ‘나는 왜 되는 일이 없지?’ ‘나도 저렇게 살 수 있었는데 나는 형편없는 인간인가봐’라고 좌절하기 시작했다. 3번째 악마는 무조건 승. 내기의 승자였다.


역시 악마는 인간보다 부지런하다. 인간이 뭐라도 할라치면 악마는 더 빨리 움직여 항상 한보앞에서 나에게 속삭인다. 결코 나보다 느려터진 적이 없다. 내가 제 아무리 우사인볼트의 속도로 뛴다한들 악마를 당해낼 재간이 없다. 지나치게 부지런한 악마에게서 벗어나는 방법은 귀를 닫고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악마가 속삭이기 시작한 순간 그 마력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인간이 아주 드물다. 나도 특출난 것이 없는지라 악마에게 잠깐이라도 귀를 내어주는 순간 망한다. 무조건 악마는 나보다 부지런하고 내 수를 한보 앞에서 읽고 있다. 그리고 아주아주 새롭고 달콤한 맛으로 날 유혹하기에 다른 방도는 없다. 눈감고 귀닫고 고개푹 숙이고 내면의 나, 그리고 나의 영혼과 대화하는 것이 악마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자, 이 짧은 우화하나만으로도 인간의 정신은 신체보다 강인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게다가. 정신이 악마에게 지배당할 때쯤 ‘내가 이래선 안되지!’라고 ‘정신을 정신차리게’ 해줄. 언급한대로 ‘귀를 닫게 해줄’ 내 몸의 그 영역이 바로 ‘영혼’, 즉 ‘의식’의 영역이다. ‘정신아, 너 악마한테 속고 있네. 그만 귀 닫아라’ 하며 자극을 주는 것이 영혼이니 인간의 육체에서 가장 후하게, 권위에 맞춰 대접해야 할 대상은 바로 영혼이다.

영혼은 정신이 제 자리를 못 잡은채 헤매며 진흙탕에 쳐박혀 나뒹굴 때 바로바로 즉각즉각 신호를 준다. 하지만 인간의 아둔함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언어를 표피적인 조합만으로 어설프게 이해한 채 자신의 인식이 이성이라 여기며 그 귀한 영혼의 자극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 역시 악마의 소행인데 말이다.


왜 내가 생각이 없는, 무뇌아로 사는지에 대해 조금 더 썰을 풀어보려 한다. ‘생각’이란 녀석을 없앤 것에는 아주 단순한 논리밖에 없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몰라.’ 그 때 알았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각은 내 모든 몸을 지배하고서는 꼼짝 못하게 어떤 세계에 나를 가둔다는 사실을. ‘갑자기’ 생각나고 ‘불현듯’ 생각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기 맘대로 내 정신을 여기저기 갖다 놓는 녀석이 생각이라는 것을. 즉 생각의 주체는 내가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주체였다면 갑자기, 불현듯 일 수 없다. 꼬리에 꼬리를 물릴 일도 없다. 적어도 내가 주체라면 말이다. 그래서 결론을 내렸다. 생각은 내가 하는 게 아니구나! 그러니 이제 생각이란 녀석 자체를 안해야겠구나.라고.


그렇다면 생각말고 뭘 한다는 건가? ‘정신 차려!’라고 말하듯이 어딘가에 골똘히, 다시 말해 생각이 날 여기저기 데리고 다닐 때 정신 차려!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니? 라는 말처럼 ‘정신’이라는 녀석이 생각을 밀쳐내고 나를 제자리로 돌려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 차려!’라고 말해주는 또 다른 무언가도 있다는 의미인데 바로 나의 정신이 제 할 일 못하고 생각이 날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도록 방치한 것을 예의주시하다가 그 때마다 정신에게 혼쭐내는 역할을 담당한 영역이 바로 ‘의식’이다. Consciouss. 깨어있는 정신 이라고 표현해도 좋겠다.


가령, 해야할 일이 있는데 소파에 누워 멍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불안한 내가 있다고 하자. 사실 그런 경우는 종종 있다. 이럴 때 ‘네가 이럴 때야? 일어나야지! 정신차려야지!’라는 감각으로 받은 신호는 나의 감정으로 전해진다. 심장이 갑자기 뛰고 머리는 ‘정신차려야지’ 라며 이성을 출동시킨 후 소파에서 박차고 일어나는 행동이 이어진다. 즉, 감각은 감정으로, 감정은 이성으로, 이성은 행동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통해 우리는 매일의 일상을 만들어간다. 이러하니 영혼의 자극, 느낌, 의식의 깨어있음이 결국 행동이 시발되는 지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행동이 문제가 있거나 느리거나 미루거나 잘못된 습관이 되어 있는 경우 행동수정은 일시적일 수 있지만 의식을 건드려 시정을 돕는 것은 뿌리를 변화시키는 것이기에 지속적인 효과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의식은 잠도 자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나를 예의주시하며 영혼과 교류한다. 영혼이 주는 자극은 그대로 나의 의식에 전달되어 촐싹맞은 정신과 정신의 말만 듣는 신체를 자기 자리에 세워두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영혼이 의식에 열심히 신호해도 알아채지 못하는 상태, 말 그대로 멍.... 한 상태에 우리는 이런 말을 듣는다. ‘넋이 나갔어?’, ‘넋놓고 뭐해?’


늘 깨어있어라. 라는 표현 또한 자주 접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불확실성이 짙고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깨어있어라 깨어있어라 무진장 들었던 이 말은 바로 ‘늘 의식하고 살아라.’, ‘늘 영혼의 소리에 귀기울여라.’, ‘늘 감각을 열어두어라.’ 라는 의미인 것이다.


===>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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