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웃음부터 나지만 나는 요즘 도전중이다.
내가 지금껏 쌓아온 논리를 확증으로 매듭짓고 이것들을 글로 써내려가고 있다.
문장의 서술어부터 달리 쓰고 있다.
'~인 듯하다.', '~일 것 같다.' 가 아니라 '~이다.' 로 끝을 맺고 있다.
용기가 필요하고 용기 이전에 충분한 검증이 되었는지에 대한 자각이 받쳐주어야 가능하다.
서술어 한두 글자의 차이가 뭐 대수냐라고 할 지 몰라도
반증의 빌미를 두느냐 안 두느냐, 즉 나의 지성의 빈틈을 찾는 꽤 디테일한 차이다.
여하튼 나의 최근 글은 확언, 확증의 단계에서 써내려가고 있다. 감히 말이다. ‘주장’이나 ‘견해’라기보다 ‘확증된 명제’라고 말하려 한다. 이유를 들자면, 지금부터 거론할 명제들은 이렇게 확신으로 과감하게 공개적으로 쓰기까지에는 근거를 찾고 논리를 만들고 실천하고 검증하며 체계를 정리하는, 다소 길었던 수년의 행보와 이를 통해 서서히 차오른 사고의 체계, 마음속 용기가 필요했다.
사고의 체계를 위해서는 더 이상 연역되지 않을 때까지 숨어있는 명제를 찾아 파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더이상 바닥이 없다 싶은 지점에서는 멈춰서서 인정하는, 학자로서, 작가로서의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감각적으로 옳다고 믿는 신념이 근거를 만났을 때의 황홀경을 숱하게 경험하면서도 내 안에 잔재되어 있는 인지 속 미숙이 혹여나 오류를 만들지 않을까 두렵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주, 즉 세상은 사물(주석1)과 에너지로만 존재한다는 근거 위에서 본연의 사물 그 자체, 그러니까 예를 들어 내 이름이 김주원인데 김주원이라 이름붙여지기 전 ‘나 자체’로까지 나를 안다면 더 이상 나에 대해 알려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설악초’에 대한 무지상태에서 설악초를 들여다보고 느끼는 그 감각처럼, ‘하늘’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늘을 보고 느끼는 그 감각처럼. 그러니까 갓난 아기가 전혀 인지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접할 때 처음 느끼는 감각. 그것이 가장 근원적인 참인 것이다.
‘형태, 색, 크기, 무게를 비롯해 물체의 속성을 이루는 모든 고유한 속성들, 즉 모든 물체 또는 보이는 물체 또는 감각을 통해 인지할 수 있는 물체들에 존재하는 모든 고유한 속성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들이라거나(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중에 물체에서 분리되어 없어질 수 있다거나, 물체에 수반된 일종의 어떤 비물질적인 것이라거나, 물체의 일부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반대로 우리는 물체가 이 고유한 속성들 덕분에 지속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물체를 이루는 일차적 구성 단위 또는 더 작은 부분들이 결합해 더 큰 합성물을 이루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고유한 속성이 결합해 물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물체는 그 물체가 지닌 모든 고유한 속성 덕분에 지속해서 존재한다고 말할 뿐이다. 모든 고유한 속성은 각각 인지되고 구별되는 자신만의 방식을 갖고 있지만, 언제나 물체 안에 내재해 있고 물체와 분리되지 않은 채로 인지되고 구별된다. 우리는 한 물체의 모든 고유한 속성을 인식했을 때 그 물체에 이름을 붙여 부른다.(주석2)’
어떠한 개념, 개념을 단축된 언어로 표현하는 이름, 그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은 고유하다는 속성을 내포한다. 고유하다는 것은 어떠한 인지와도 섞이지 않고 구별되어 있다는 의미다. 어떤 프레임으로 그것을 들여다보는 것과 자체 그대로를 들여다보는 것의 차이에는 들여다보는 주체의 인지가 포함되느냐 포함되지 않느냐의 차이가 존재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지는 편향과 편견의 속성을 지니기에 오류를 포함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닌다. 내가 나의 인지를 점만큼이라도 포함시켰다면 외부로부터 나에게 탐구하기 위해 들어온 그 상태에 나의 인지를 묻힐 수밖에 없다. '참'인 본질이 내게 투입된 그 순간, 나의 내부의 무언가와는 무조건 섞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참에서 조금은 빗나갈 우려는 무조건 존재한다.
따라서, 어떤 프레임도 없는 상태까지 사물 그 자체를 들여다봤다라고 여기면,
더 이상 반증할 수 없는, 아무리 찾아도 더 질문이 나오지 않는 그 곳까지 가면,
그렇게 심정적인 인증이 되면
‘부족’할 수는 있지만 ‘인지의 오류’에서는 멀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성의 부족으로 다소 미흡한 명제일지라도 오류를 품은 거짓이 아니라 조금 부족한 참이 될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기로 했다.
이와 같은 전제를 두고 지금 집필중인 글들은 나의 견해나 주장이 아니라 반증할 수 없는 확신을 갖는다. 나 스스로도 반증하지 못하는 확증의 단계까지 오는 과정은 치열했고 지독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긴 시간을 지나 최근 나의 심정은
곪아서 심해진 통증의 마지막을 고하며 종기를 터뜨리는 느낌이랄까,
지독한 오물 속에서 보낸 역겨움의 마지막을 고하며 그리도 찾던 보물을 발견한 느낌이랄까.
젖은 운동화를 신고 질척거렸던 마지막을 고하며 새신을 신은 후련한 느낌이랄까....
현재 집필중인 글을 하나씩 언어화하는 난제를 스스로 떠안으면서도 난해함과 함께 배꼽밑에서부터 차오르는 경이로운 순간들을 느끼고 또 앞으로 쏟아지는 글들이 기다려지는 것은 그만큼 나누고 싶은 심정이 커서일까,
아니면, 내가 발견한 원석같은 보석을 세상에 내놓는 뿌듯함 때문일까.
드러난 명제들로 누군가가 인생의 미소를 다시 지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때문일까.
최근 나의 머리속은 글쓰기로 가득하다.
머리에만 가득한 게 아니라 마음에도 뭔가로 꽉 차오르고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또 다른 시선의 나에게 의지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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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사물’이란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근거하여 ‘생명이 있든 없은 이 세상 모든 것들’로 개념화한다.
주2> 에피쿠로스쾌락, 에피쿠로스, 박문재역, 2022, 현대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