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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일단 순종하라 일렀습니다.

나는 나를 키웁니다. - 마인드리셋 10

by 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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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일단 순종하라 일렀습니다.]

몽테뉴가 제발 순종해라! 했으니 순종하기로 했다. 나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참으로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이다. 바보처럼 말을 잘 믿고 잘 듣고 잘 따라하고 시키는대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바보가 된 경우도 여럿인데 바보니까 바보가 된 것이라 이상할 것도 없다. 이런 나의 성향대로 나는 순종하라 했으니 순종하기로 했다.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거 나는 참 잘한다. 물론, 아무 말이나, 누구 말이나 듣는 천치는 아니다. 그저 들을만하다 싶어 듣겠다 했으면 무조건 이유불문하고 토도 달지 않고 잘 따른다는 말이다.


내가 나의 마인드를 변화시키기 위한 지난 4년여간의 단계를 1~10단계로 나눠 기록하는데 있어 마지막이 ‘순종하라.’이다. 말 잘 들어 바보인데 더 바보가 되라고 나에게 이르는 격이니 여기엔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이유가 있다. 바보처럼 순종을 잘하는 나의 성향에 너무나 걸맞고 이러한 순종적인 나의 성향 덕에 나는 나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순종해야 할 대상은 일단 우주의 원리, 자연의 흐름, 나 자체가 지닌 본능이다. 나머지는 거부다. 거부의 의미는 배척이 아니라 관심두지 않겠다는 의미다. 이는 배척도 저항도 없다는 의미이기에 갈등도 없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저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는대로, 머무르는 것은 머무르는대로, 오는 이 막지 않고 가는 이 잡지 않고 내게 진입한 사건은 사건대로 알아서 볼일보고 나가게 냅두고 나를 비껴간 어떤 행운에 대해서도 염두에 두지 않겠다는 의미다.


순종하는 것이 삶에 유리하고 나에게 나로서 깊이 있게 살게 하는 덕(德, virtue)이 되는 첫 번째 이유‘일은 일이 가는 길이 있고 나는 내가 가는 길이 있다’는 원리 때문이다. 나를 중심으로 드러나는 모든 증상, 현상 모든 것들은 나를 거쳐가야 할 이유가 있어 내게 온 것이니 내가 개입하지 않고 그저 나에게 머물며 서둘러 일을 마치고 가게끔 내가 관심두지 않는 것이다. 간섭하고 방해하지 않고 그 자체가 지닌 이유가 있음을 인정하고 믿고 좋든 싫든 그저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나는? 그저 내 할 일 하는 것이지.


순종하는 두 번째 이유는, 내가 우주의 중심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쉽게들 말한다. 인간은 한 세계라고, 자기자신이 하나의 우주라고. 그런데 말만 알았지 의미는 몰랐었다. 이제 조금 안다고 자부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모르지 않으니 안다고 하겠다. 우주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모든 것들을 조화롭게 아주 철저한 계산에 의해 움직인다. 전체 안에 부분이 움직이는 것이다. 하다 못해 먼지하나까지도.


나도 그 중 하나다. 생명이 있든 없든 모든 것이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과학적 근거에 따라 원자는 에너지로 움직이며 서로 소통하고 소통은 서로의 연합과 단절을 반복하며 전체 안에서 움직인다. 작고 보잘것없은 것 하나라도 모두가 어떤 원인이 되며 원인은 결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내 아무리 미천하고 미숙하고 작은 인간이라 하더라도 무언가와 소통하고 에너지로 교감하고 있으니 나로부터 어떤 원인이 발생하고 결과를 도출하여 우주에 영향을 미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큰 것이 작은 것을 품는 물리적인 현상이면에는 작은 내가 큰 우주를 품는 모순 역시 우주의 신비로운 조화의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우주의 원리에 순응한다는 것은 내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이며 어떤 결과를 위한 원인이 되기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만이 옳고 바람직하다는 결론이다.


순종하는 세 번째 이유나는 그저 매개자일 뿐이라서다. 위에서 언급한 2가지 이유와 같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주체적인 인간이지만 주체라는 것이 주체가 아닌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기에 진정한 연결을 위한 주체가 되어야만 한다. 즉, 연결자, 매개자로서 주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인간으로서, 가족으로서, 여성으로서, 교육자로서, 세상을 이루는 한 개체로서, 자연으로서, 하나의 생명으로서... 무엇으로서든간에 나는 주체적으로 독립적으로 나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전체의 조화에 이로운 것이다. 다시, 이로움을 주기 위한 주체로서의 삶이라고 하면 더 이해가 될 듯하다.


물론 더 여러 가지의 조합으로 나는 ‘순종하라’는 명을 나에게 내리고 나의 판단을 되도록 멀리하며 그저 바라보는 위치에서 나의 삶을 살고 있다. '현실의 내'가 살고 있고 '바라보는 내'가 있다고 하면 이상하려나? 현실의 내가 어떤 의지에 의해서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무언가에 저항하려 하면 바라보는 내가 얼른 나서서 현실의 나의 의지를 말린다. 나의 의지보다 더 큰 의지가 나를 이끄는 중이니 나를 내려놓으라고 나를 달랜다. 예전같으면 바라보는 나도 없었고 설사 있다 해도 말을 듣지 않았을텐데 이제 참 말을 잘 듣는다. 분명한 것은 내 안에는 더 위대한 나, 더 큰 나가 있으며 나의 미래는 내가 알 수 없고 어떠한 커다랗고 신비로운 영적 존재에 의해 나의 삶이 가장 적합한 자리로, 어울리게 만들어질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것에 나는 아주 감사하고 있다.

이러한 믿음과 감사가 없었다면 나는

늘 나 스스로 판단하려 애쓰고,

없는 의지를 끌어내려 용쓰고,

다가가지 못할 신기루를 바라며 떼쓰고 살았을지 모른다.

이제 그런 것이 거의 없다.

그저 흐름대로..

나는 본성에, 원리에, 대자연의 대법에 순종한다.


2014년 내가 이름을 바꿨다.

주.원.으로.

심지 주(注) / 강물 원(沅).

중심을 잡고 흐름대로 살겠다. 는 나의 다짐이 담긴, 내가 지은 이름이다.

주체자로서의 나는 대법의 흐름에 따라 순종하며 산다.


50의 나는 오늘도 나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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