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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신은 공동의 것이니...

by 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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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러한 글을 씀으로 인해 나를 어떤 철학가나 사상가로 대접해주길 바라거나 나의 위치가 그러한 반열에 오를 기대나 의도를 지닌 것은 아니다. 칸트의 표현대로 ‘직업적인 사상가들’을 열망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의 연구주제나 깊이 들여다보고 그 방향으로 나를 확장시키는 대신 이렇게 개인을, 인간을, 나를 고찰하는 시간으로 내 모든 하루를 보내며 나를 뒤집어보고 바로 세워보고 이리저리 훑고 고치고 다듬는지에 대해서는 딱히 이유를 들자면 몇 가지가 있을 듯하다.


우선, 나는 과거처럼 살기를 거부한다. 과거에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왔던 시간에 비례하여 내 인생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따라서, 다가올 시간들은 내가 있는 내 삶 속에 오로지 내 정신을, 나를 들이고 싶다. 나의 말과 글, 그리고 모든 행위는 새롭게 창조되는 것들이다. 내가 창조하는 것에 남의 삶을 묻히기 싫고 나의 창조가 남의 것에서 기인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듯하다. 나의 창조로 나의 인생이 설계된다면 나는 오로지 나로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나답게 살아보는 쪽을 택하고 싶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무엇에 감동하고 무엇에 고개를 젓고 무엇에 진저리를 치고 무엇에 나를 고귀하게 여기는지를. 그리고 내가 어떻게 쓰이고 싶고 쓰여야 할지를..


둘째, 나는 ‘닮아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나에겐 내 목숨보다 귀한 아들딸이 있다. 세상 모든 에미가 그러하듯 나 역시 이 두 녀석만큼은 자기 인생을 살길 바란다. 누구의 눈치를 보거나 자기 능력을 과신 또는 하대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들을 꺼내어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되길 바란다. 미약한 내가 세상에 일익하는 유일한 길은 내가 낳은 자식만이라도 세상에 올곧게 쓰이게 하는 것이다.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한 인간을 귀하게 쓰이도록 키우는 자체만도 얼마나 비범한 것인가? 그만큼 숭고한 정신은 없을 것이며 그만한 가치있는 삶도 드물 것이다. 이는 오로지 ‘보여주는’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내가 알지 못해 보여줄 수 없는 부분들은 성현들의 책을 읽게 함으로써 알려줄 수 있으니 세상의 원리부터 삶의 진리, 이치, 그리고 시대정신과 현실에 대한 자각, 자기탐구까지 모든 것들을 이 아이들이 알고 살아가길 바란다. 한 사람을 제대로 키워낸다는 것은 단순한 에미로서의 의무이기 이전에 세상에 먼저 태어난 자가 일궈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소임이라 여기기에 나는 이 소임을 다함으로써 내 인생의 기본이라도 제대로 해낸 인생으로 내 삶을 채색하고 싶다.


셋째, 내게 보여지는 세상에 불만이 많아서다. 대한민국만큼 교육열이 높고 내 주변인들만큼 성실하고 정직한 이들도 없는데 이들 모두가 삶을 고단해 한다. 어느 누구도 ‘나 너무 행복해 오래오래 살고 싶어’라고 말하는 이가 없다. 이는 사실이다. 매일 불안과 두려움에 눈을 뜨고 현실적인 관계로 인해 눈물을 흘리고 조금만 새로운 갈등에 봉착하면 뒤로 한걸음 물러나 자신을 학대하며 많이 지녔는데도 더 가지려 애쓴다.


왤까...

나라고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이러한 것이 진정한 삶인 것인가?

내가 답을 얻을 수는 없겠지만 내 인생, 내 주변의 사랑하는 이들의 인생이 이리 흘러간다면 어딘가 깊은 정신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지 싶은 마음이 내 안에서 크게 소용돌이치고 있다. 숭고한 정신, 고귀한 인생을 사는 것은 아주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하루하루가 연결된 미래로 걷는 삶에 있어 나는 고귀한 삶을 사는 고귀한 인간이 궁금해졌고 책에서 만나는 고귀한 존재들을 따라 내 인생을 그 방향으로 이동시키고 싶다.


그리고 이러한 탐구를 통해 나는 나의 본성에 따라 살고 있음을 느낀다. 군중 속보다 홀로일 때 나는 더 나를 잘 느끼고 이해관계속에서 승부수를 던지기보다 내 자신을 이기는 쾌감이 훨씬 크며 너무 빨리 변하는 사회속, 타인과의 경쟁이어야만 하는 사회에서 얻을 것이라곤 피곤한 스트레스뿐이라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사람을 다소 멀리 두는 편인데 멀리 두는 이유가 나를 살피기 위함이지 타인을 꺼리기 때문만은 아니란 사실도 알았으며 남의 견해나 조언보다 책을 통해 나를 더 이해하는 힘을 얻는다. 어떤 지위나 명예, 자원이 주어졌을 때보다 나는 내면에서 무언가가 차오를 때 더 부유함을 경험한다. 나라는 존재의 본성이 이러하다면 나는 이렇게 사는 방향으로 걷는 것이 옳지 않을까... 여기까지 느낌이 차오르니 나는 내 걸음을 뒤로 돌리거나 시간을 뒤로 물릴 생각이 전혀 없다.

이렇게 걷는 나의 길에서 나는 삶, 사유, 사람, 사랑을 깊이 들여다 보는 행운을 얻는다. 이 길의 곳곳에는 수많은 진리가 숨겨져 있고 나는 머리로만 알던 진리들이 어느 순간 가슴에 와닿을 때 심장이 두근거려 어린아이처럼 히죽해죽대며 혼자 신이 나서 주체하지 못하고 촐랑댄다. 나에게 즐거움이란 이런 것이었다. 롤러코스트를 타고 신비한 나라를 여행하고 화려한 음식앞에서 느끼는 재미와는 결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나만이 느끼는 비밀스러운 쾌락이다.


처음엔 변하고 싶어 시작했던 독서와 글쓰기가 이제는 나를 변화시킨다.

내가 일상을 만들었지만 이제 일상이 나를 데리고 논다.

매일매일 같은 일상이라 남들은 지겹지도 않냐고 하지만 천만에,

나의 일상은 매일 같지 않다.

다르다.


매일 내 눈앞에 펼쳐놓은 책이 다른 정신을 나에게 주입하고

나의 육십조세포는 이들을 소화하느라 매일 운동중이며

소화가 안되어 체하면 체하는대로

너무 깊은 호흡으로 쑥쑥 받아지면 감각기관이 서로 열일하느라 경쟁하는 통에

나의 하루는 내 몸을 느끼느라 신나고

신나는 시간을 잠시라도 더 부여잡느라 분주하고

'하루'라는 온전히 날 것으로 내게 온 존재덩어리를 허무감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애쓰느라 진땀낸다.

하루의 즙을 내어서라도 나는 나에게 주어진 선물같은 하루에 온전히 나를 버무려 섞어내고 있다.

일상이 지루하고 단순하며 늘 같다고 본다면 그것은 나의 거죽만 보는 그 사람의 착각이다.


오로지 나의 정신을 위해, 나의 정진을 위해, 나의 정복을 위해 나는 매일 똑같은 일상에 혼을 담아 특별한 하루를 만들어낸다. ‘정신영역은 공동영역’이라는 한나아렌트(주)의 명언에 심장이 심하게 뛰었다. 내 정신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내가 나의 정신을 제대로 다룰 줄 안다는 것

사유(생각의 길)의 정돈됨을 의미하고

그 길 위를 노닐다 어떤 선택앞에 보다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는 머리와

판단으로 행해질 다리가 제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의 행위는 세상 무언가와 무조건 연결되어 있기에 나의 정신은 나의 것이 아닌 것이다.


이로써 나는 또 다시 증명한다. 강조한다. 주장하고 설득한다.

나를 제대로 키워내고 나를 먼저 돌보는 정신이야말로 진정한 선을 행하는 선인의 정신임을.


나라는 개인은 나의 수준에 맞춰 이렇게 자발적 고립 속에서 홀로 정진하지만 이 모든 시간들이 세상의 무언가를 위한 정진이라는 진리가 나를 너무 흥분시킨다.

어딘가 쓰이고 있는 듯, 어디에 닿을 듯, 어딘가에서 솟아오를 듯 나는 몹시도 나의 일상을 즐기고 있다.

평범한데 너무나 특별하게 만들어지는 하루하루.

이 하루하루의 어느 날, 무언가가 나를 쑥 끄집어올려 어딘가에 툭 떨어뜨릴 듯하다.

이 하루하루의 어느 날, 나는 쑥 솟아올라 어딘가에 훅 닿을 듯하다.

이 하루하루의 어느 날, 저랬던 내가 이렇게 웃으며 나의 지난 시간들을 음미하며 바라볼 듯하다.

쑥 솟아올라 툭 떨어져 음미할 수 있는 그 시간....

오늘처럼 반복되는 어떤 오늘이겠지.


이런 단순한 나는

어제도 행복했고

오늘은 충만하고

내일은 더 맑을 것이다.



주> 한나아렌트, 정신의 삶, 홍원표역, 2019,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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