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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Nov 15. 2023

'삶을 악착같이 살아가는 게
내가 품은 벌'이라지만

새벽독서 1800일을 향하며


'삶을 악착같이 살아가는 게 내가 품은 벌'이라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나도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가는 게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아미엘(주 참고)이 '인생은 간난(艱難)'이라 했던 말에도 고개 끄덕이며 수긍했다.

아마도 저변에 깔린 나의 인식, 관념, 정서가 이러하겠지


그런데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오늘 조심스레 고백한다. 

'이번 생은 벌인가?' 하면서도 '아니야, 이 정도가 벌이라면 벌치고는 너무 약하잖아. 상일거야. 아들딸 두 녀석이 성인의 대열에 제대로 잘 진입한 것만으로도 상을 받고 있잖아.' 라고 위안, 자족했었는데 이러한 사고의 연쇄가 만들어진 인과(因果)에서 약간의 오류발견, 오늘 재정리해볼까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인생은 상이다.


말 잘하는 내가 요즘 새벽독서 후 토론시간에 얼음이 되기도, 단어를 찾지 못해 애먹기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몰라 어색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감동(感動)때문이다. 

움직임(動)이 느껴져서(感)이다. 


감동은 스스로 생성되지 않는다. 외부의 감각이 날 가격했을 때 내면에서 일어나는 진동이 감동이다. 한줄의 글에서, 한마디의 말에서, 눈앞에 포착된 한컷에서, 순간 떠오른 과거기억의 부유(浮遊)에서, 품은 미래의 영상에서처럼 어떤 자극이라도 주어져야 인간의 내면은 진동한다. 


그런데 가감없이 나는 말할 수 있다. 새벽독서모임의 사람들, 책들, 토론은 나에게 무.한.감.동을 선물한다. 감동의 끝이 없다는 것을 실감할 정도로 나는 매일 새벽 너무나 커다란 진동을 선물받는다. 진동은 울림으로 울림은 전율로, 전율은 다시 나의 이성으로, 행동으로 옮겨져 더 나를 집중시킨다. 온라인이지만 매일 얼굴보고 대화나누는 이들이지만 매번 난생 처음 느끼는 감정을 만난다.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다른 차원에서 움직이는 것이 분명하다. 했던 얘기 하고 또해도 깊이는 계속 깊어진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울컥 목이 메이고 이어 눈에 눈물이 고이기도 한다. 내면의 감동이 울림이 되면 세포들마저 자극받아 진동한다는 신호다. 진동이 거세지면 구석구석을 차지하던 액체들이 비좁아 몸 밖으로 흐르는 것이다.


새벽독서에 이어지는 독서토론. 새벽마다 읽고 말하고를 반복할 뿐이다. 근사한 곳으로 장소를 옮기는 것도, 근사하게 치장하는 것도, 근사한 먹거리를 앞에 둔 것도 아니고 그저 각자 집안 한켠에 마련된 책상앞에서 자다 일어난 모양새 그대로, 나처럼 부족함을 채우려는 이들이 함께 읽고 책으로부터 성장하는 자신을 드러낼뿐이다. 그렇게 하루의 '양'이 쌓이면 '성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질'적인 어떤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감정을 우리는 보게 된다. 상대의 눈빛을, 표정을, 살짝 맺히는 눈가의 촉촉함을 통해,...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부피와 밀도를 만들고

보이지 않는 것이 다시 보이는 액체와 근육의 움직임을 생성해내는 

표현할 언어를 찾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의 에너지 순환에 

나는 매일 새벽, 감.동.받는다.


자신의 변화에 눈물흘리는 이,

하나의 글귀에 자신이 보여 눈물흘리는 이,

눈물흘리는 이의 옆에서 공감되어 눈물흘리는 이,

이 전체의 기운에 내가 속해 있다는 포근한 안도감에 눈물흘리는 이,

내가 저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라는 어렴풋한 설레임에 눈물흘리는 이,

내가 저들로 인해 성장하고 있다는 감사함에 눈물흘리는 이,

함께 공명하는 성장에... 

정체모를 이 '하나'가 주는 안락함에 죽죽 흘러대는 눈물과 못나지는 얼굴을 주체하지 못한다.


인생이 간난. 이라지만,

악착같이 살아가는 것이 내가 품은 벌이라지만,

나는 이를 거부하겠다. 


인생이 오늘 새벽같은 짙은 어둠 속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라지만,

그래도 매일 새벽, 

가끔씩만 날 찾아왔던 감사와 사랑과 진실과 온기와 열정과 희망과 안도의 감동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이 자체만으로도 나의 이번 생은 상이다.

길을 잃은 양은 길을 잃은 것 자체가 벌이라는데

나는 나의 삶의 길을 걷고 있으니 벌이 아닌, 상이라 감히 말해도 될 듯하다. 


이로써, 나의 오래된 관념에 금이 가는 것을 느낀다.

나의 인생이 상이구나.

나의 인생이 감사구나.

나의 인생이 귀하구나.

나의 인생이 값지구나.

나의 인생이 이렇게 새롭게 개념화되다니... 나는 매일 새벽 놀라울 뿐이다.

이번 생이 '벌'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내 속에 들어앉았는지 모르면서도 그리 여긴 채 악착같이 살아왔는데 

이번 생이 '상'이라는 개념으로 또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여전히 모르면서 그리 여기며 다시 악착같이 살아보기로 한다.


같은 악착이지만 

전자의 악착이 오기, 투지, 자만, 비굴, 회피, 처절, 비교, 지독이었던 '나만의 자전(自轉)'이라면

후자의 악착은 자기(自起), 자리(自利), 자선(自善), 자생(自生), 자정(自淨), 자유(自由), 자전(自全)으로 자전(自轉)하며 공전(共轉, 함께 도는)하는 악착이다.

격이, 차원이, 질이 다른 악착이다. 

괴로움을 탈피하기 위한 악착이 아닌, 

감사로 충만케하기 위한 악착이라

이는 여유이고 집중인 것이다.


지독한데 아름답다.

치열한데 여유롭다.

고달픈데 행복하다.

못났지만 잘나진다.

미숙한데 충분하다.


나의 새벽은,

나의 새벽독서는,

나의 새벽독서 멤버들은,

나에게 감사이자 사랑이다.


대상이 표상이 된 것이다.

상대가 절대가 된 것이다.

한계가 경계가 된 것이다.


새벽은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또 나는 새벽에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나는 그저,

새벽의 기운을 맞으며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매일 새벽의

공전(共轉)은..

공명(共鳴)은..

공생(共生)은..

공유(共由)는..

얼마나 거대한 선물인가...


나는

그저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었을 뿐인데...


고로 나는 새롭게 규정한다.

삶을 악착같이 살아가는 것이 내가 품은 벌이었을지라도

곧 보상될 상을 위해 치러야 할 순리의 흐름일뿐이라고.


주> 아미엘일기, 아미엘,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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