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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Nov 22. 2023

에피파니(epiphany)의
전율을 기다리며

독서에 대하여

내가 책을 읽는,

공부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나의 부딪히는 삶 속

대인, 대상, 대물.

즉, 

사람과의 관계

현상, 일상과의 관계

도구, 환경과의 관계에 대한

더 높은 차원의 이해를 통해

지독하게 날 훼방놓는 것들로부터 안전하게 나의 정신을 지켜

내가 서 있어야 할 곳에 제대로 서 있기 위함이다.



정신이 제자리를 지키게 하기 위해



정신이 자기 자리를 지키게 함으로써

각 범주의 법칙, 나아가 이를 관통하는 삶의 원리에 따른

자체 운용체계를 갖추고 나의 신체와 감정을 끌고 가주길 바래서다.

그 체계가 보다 촘촘하고 엄밀한 절차로 구성되어 나의 이성을 조종하는데 있어

보다 부드럽고 유들거리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그 체계안에서 이성으로부터 강령된 더 명확한 행동 -표현의 모든 것- 으로

나를 꼼짝 못하게 제압하기 위해서다.

꼼짝 못한 채 지령받은 움직임 -언어, 표정과 같은 표현 및 행동- 의 실행에

나의 초월된 이성이 또 다시 운용체계에 결합되어

지속적으로 정신체계를 진화시키기 위함이고

이러한 진화의 연속과 지속은 내 인생에 충분히 유리하다는 판단이 확고해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과정으로 형성된 판단의 질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세상이 내게 원하는 '바로 그 길'로 들어서게 해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이로써 나의 언어에는 혼을 보태고

이로써 나의 다리에서 나태를 걷어내고

이로써 나의 사고는 자유롭게 운용될 것이다.



지력(智力)으로 가는 시력(視力)을 키우기 위해



책은 나를 더 제대로, 자세히 볼 수 있는 시력을 키워준다.

사람이 거울을 통해 자신의 형테를 보듯

책은 보이지 않는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내면의 거울이 된다.

애덤스미스가 말한 '공정한 관찰자'로서의 나를 키워내는 데에 책만한 것이 없다.


공정한 관찰자는 나보다 훨씬

개인적으로는 지혜롭고, 사회적으로는 윤리적이며, 공공으로는 덕을 실행하고,

보편적으로는 진리를 감지할 수 있는 시력을 갖추고 있기에

그의 주시(注視)는 나의 현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면서

나의 이성을 훈련시킬 수밖에 없도록 나를 이끈다.

시력을 키움으로써 지력이 강화되는 효과.

이것이 독서가 내 인생에 기능함으로써 얻는 효과다.


이러한 거울기능으로써 독서는 충분히 가치롭다.

심지어 책으로부터 강화된 시력은 나를 감시 내지 주시하는 공정한 관찰자의 수준과 위치까지도 세심하게 살피기에 

나도, 나의 관찰자도 함께 키워주는 도구로서 책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합리와 비합리의 연결을 위해



김우창교수는 비코의 견해를 가져와

'우리가 과학적인 이성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비코의 주장처럼 '공동체의 양식', 즉, 공통감각으로 인해서인데 이것이 삶의 지혜, 프로네시스나 프루덴티아에 통하고 이러한 지혜가 언어에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주)'고 말한다.

프로네시스(실천적 지혜)와 프루덴티아(신중 또는 판단적 지각)

학자로서 내가 연구하는 중심주제이기도 하다.


글자가 가진 의미보다 훨씬 더 깊고 방대한 해석이 가능한 이 두 단어의 함축된 의미안에서

우리의 이성을 논한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바다 전체를 훑어내려는 무모한 시도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한다.)

과학적 지성에 초월된 이성까지를 망라하겠다는 무모하고 야심찬 시도이지만

무모와 야심 덕분에 우리는 비코의 견해처럼

'이성'은 과학적인 측면만으로는 부족하니 비과학적에 토대를 둔 '지혜'를 연결시켜야

좀 더 완성된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이미 프로네시스의 비과학적인 부분이 비합리적이라는 뜻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다. 지혜라는 추상적 단어가 인류와 함께 존재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회과학의 범주에 진입이 가능하고 창의와 통찰, 직관과 같은 단어 역시 수치화될 수 없으나 사회과학의 범주에서 수많은 합리로서 인정받고 있다.


책을 읽으며 바라는 바는,

바로 이렇게 비과학적인 인간의 기능을 과학적인 합리로 연결시켜줄 

'초월한 선제적 경험'을 다양하게 얻는 것이다.

간접적이지만 선경험으로 지식화된 수사적 설득에 내가 굴복하는 태도를 가짐으로써

우리는 비합리가 아닌, 다른 차원에서의 합리, 즉, 초월된 이성을 얻고 쌓게 된다.


이 초월된 이성은 미세한 플랑크톤부터 거대한 흑돔고래까지, 이들의 생태계를 총망라하여

연결에 연결을 거듭한 끝에 우습게도 궁극에는 고래가 플랑크톤을 먹고 산다는 단순한 사실을,

여기와 저기가 연결되어 비과학에서 과학으로 입증된 것을 다시 비합리로 이끌어내는

변증의 논리체계를 내 이성에 장치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의 순환으로 단순한 나의 일상의 팩트가 공동체적인 의미를 찾아가는

어마무시하지만 단순한 이치를 경험으로 깨닫게 된다. 

선제적경험의 축적이 누적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독서는 

현상에 대한 단순한 이해관계를 파악하는 수준이었던 나의 이성의 현주소에

선제적 간접경험을 배치시키고

나의 서사인 직접경험을 보태어

이성에 혼(魂)이 실리는 초자연적인 힘을 내게 부여한다.

결국, 

나의 이해수준은 해석수준으로 승격되고

해석은 현상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는 통찰로,

통찰은 초월적 지성, 즉 지력으로 장착된다.



바위를 깨뜨리기 위해



자신이 일상에서 접하는 사물, 대상등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 이해를 통해 정신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질서잡힌 이해를 통해 또 새롭게 내게로 올 일상의 해석차원을 높이기 위해


이같은 사고의 순환을 위해

데카르트는 반복된 명상을,

에머슨은 실천의 반복과 훈련을 거론한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훈련하고 반복해야 한단 말인가?

점검과 검열이다.

한마디로, 성찰이다.


성찰은 반성을 전제한 의식적 의심과 자각이다.

가슴과 언어의 결합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정신과 다리까지 모두를 검열하는 것이

진정한 성찰이다.


성찰의 반복

이를 위한 토대로서의 독서

독서를 통한 자각 


일정시간의 독서가 반복되면

우리는 더 높은 차원으로 일상을 해석하고

우리의 일상을 자신의 목적을 너머 공동의 목적으로 연결시키면서

일상을 더 진실되게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자신을 탐구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난제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계란과 같이 나약한 나는 바위처럼 단단한 나의 인식을 깨뜨려 변화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체가 아닌, 퇴보다.

인식의 파괴는 새로운 나, 온전한 나, 진짜 나로의 진화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리려면 '사상(思想, 논리적 정합성을 가진 통일된 판단 체계)'을 주입하면 된다.

잠재와 초월은 분명 물리와는 다른 차원의 힘이기에

지속적인 사고의 주입은 바위도 깨뜨릴 강한 힘을 갖는 훈련인 것이다.

따라서, 독서는 나를 탐구하기 위한 훈련이다.


가슴과 다리와 머리,

과학적 이성과 초월된 이성이

해석을 너머 사상으로 구축되면

지금의 나를 깨뜨릴 수 있다.

이것이 책이 주는 선물이며

독서의 위대함이자 독서의 이유다.



고차원적인 쾌락의 경험을 위해



독서가 주는 기대이상의 선물은 무한한 무형의 자산이다.

언어를 눈으로 접했을 뿐인데

독서가 독서를 이끌다 보면

어느 순간,


남들이 감탄하는 그 지점에서 나는 비판을,

남들이 비판하는 그 지점에서 나는 통합을,

남들이 통합하는 그 지점에서 나는 재창조를 발현한다.


나의 정신에 자리잡은 원리, 즉 대법(大法)을 기준으로

내 삶이 느닷없이 치고 들어오는, 또는 늘상 자리하고 있는 불편한 감정들 -불안, 심려, 긴장- 은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


튼실하게 잡아둔 계획도

세밀하게 줄세운 관계도

성실하게 일궈온 일상도 파괴시킬

용기와 재건설의 의욕을 불러온다.


정신의 질서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내 시력과 다리, 마음의 근육이 증진됨을 알게 되는 순간,

책이 나를 이끌었는데

내가 책을 이끄는 지점, 수준, 나아가 경지는

누구나 반드시 만나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정신에 사상이 견고해지면

읽어야 할 책과 읽으면 손해인 책을 직감적으로 구분짓고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책이 스스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신비로운 고차원적인 쾌락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지성의 보유는

책 너머 어딘가에 존재하는 

자신이 다다를 사유세계를 먼저 탐험하고

그 자리로 가는 수단으로서의 책을 선별하는

자신만의 요령(要領)까지 손에 쥐게 된다.


각론하고 

책은

꼴같잖은 무기들고 설쳐대는 내 얼굴을 화끈거리게 하고

진짜 꼴값 한번 해보자고 기대하는 내 얼굴에 열을 올린


이러한 독서에 대한 믿음은

오늘도 나를 책앞에 경건하게 앉히며

느닷없이 찾아오는 환각적인 에피파니(epiphany)의 전율을 기다리게 한다.



주> 애덤스미스, 도덕감정론, 2009, 비봉출판사

주> 김우창, 깊은 마음의 생태학, 2014, 김영사


* 삶을 위해 나를 공부하는 곳, 지담북살롱 독서모임, 

   매일(주말제외) 새벽 5-6시 책읽고 6-7시 토론및 강의가 이어집니다! 

지담북살롱 : 네이버 카페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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