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의 절름발이
* 본 글 '부, 그 사유와 실천'은 현재 '글로벌경제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지담의 컬럼입니다.
우리는 참 많은 것을 배운 사람들이다. 적어도 내 주변에서 문맹은 찾기 어려워졌고 학교 문턱도 못 가본 우리네 할머니 세대들에 비해 학교는 대부분 다녔다. 수치화된 통계로 볼 때, 우리나라의 대학 이상 고등교육 이수율은 OECD 기준, 한국이 세계 1위다.(OECD 2020년 10월 5일 발표, 세계 순위를 인용하여 보도한 다보스 포럼). 그런데 다들 알지만 다소 무뎌진 발표 결과가 있다. 노인빈곤율 OECD 최고 수준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통계에 대한 여러 가지 다양한 관점들은 차치하고 여기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단 하나다.
도대체 이렇게 많이 배워서 많이 아는데 왜 사는 능력이 없는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묻고자 한다. 복지, 정치, 사회 등을 외면하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범주 말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주(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주는 나밖에 없다. 자식도 내 말을 안 듣고 심지어 내가 주인인 강아지도 자기 맘대로 하기에) 안에서 일단 나부터 성장해보자는 관점이다.
새벽독서가 일상화된 내가 오랜만에 다시 잡은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에서 그는 고백한다. ‘수사학, 논리학, 기하학, 음악, 산수 등에 관한 모든 공부에 있어서 별로 크게 곤란을 느끼지 않고 또 누구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은 일 없이 척척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중략) 이것들은 나의 이로움이 되지 않고 되레 나를 멸망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 고귀한 재산의 힘을 선용하지 못하고 (중략) 아무리 좋은 재능도 이를 선용하지 않는다면 무슨 보람이 있겠나이까“
이 고백은 나를 비롯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듯하다. 정말 많이 배웠는데 지금 나의 재능은 어디에 무엇을 위해 쓰이고 있나? 단지 돈벌이 수단으로? 타인을 지배하기 위해서? 나의 욕정과 탐욕을 과시하는 것에? 지적허영으로? 흔히 말하는 ’라인‘을 잘 잡기 위해? 여기에 하나라도 해당되지 않다면 다행이지만 대다수가 배운 것보다, 자신의 기대보다 훨씬 못 미치는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르겠다. 배움을 나누기는커녕 활용조차 못하는 나는 어쩌면 복지와 제도, 시대 탓을 하며 소중한 나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처럼 나의 배움은 선용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선용은 좋은 일에 쓰인다는 의미의 善用이지만 먼저 쓰여보자는 先容으로도 말하고 싶다. 내가 배운 것을 좋은 일에 남보다 앞서서 활용해보자. 이것이 바로 나를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사회적인 ’부‘로 이끄는 지름길임을 확신한다.
배운 자는 어쩔 수 없이 배우지 못한 자를 위한 책임까지 안아야 하지 않을까? 세상은 양가성의 논리로 움직이니 한쪽에서 배우면 한쪽에선 배우지 못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래서 나의 배움은 그들의 몫까지 책임으로 떠안은, 기가 막히게 운이 좋은 인생에 덤으로 책임까지 부여받은 내 몫일지도 모른다. 비약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배움의 선용‘이라는 관점에서 나의 배움은 나눠야 한다는 논리이기에 비약보다는 책임의 크기라고 규정하고 싶다.
매일 새벽독서가 일상화된 나는 수년간의 새벽독서가 축적되어 책으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배움을 얻는다. 나의 이런 모습이 좋아 보였는지 같이 하려는 이들이 동참하고 이는 다시 더 큰 나눔으로 번지게 하려는 바람을 품게 되었다. 새벽의 힘은 놀랍다. 동이 트기 전부터 동트는 그 태양의 기운이 나를 온전히 나로서 존재하게 하고 이 기운을 받은 독서시간은 나를 오로지 나에게 집중시키며 나의 내면을 깨뜨리고 새롭게 다듬어준다. 내 안은 자연스레 새벽의 기운, 시작의 기운, 우주가 내뿜은 메시지로 가득 찬다. 에너지는 진공으로 존재할 수 없기에 나의 하루는 이러한 엄청난 에너지로 채워 시작한다.
박사까지 했으니 사회적 기준으로 그저 남보다 더 배웠다는 착각과 이로 인한 판단으로 살아왔던 내게 나의 내면의 소리를 듣게 해주고 내 판단을 내려놓고 성인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더 큰 일을 위해 나의 배움을 아낌없이 나누라는 겸허함을 알게 해준 이 시간, 이보다 더 큰 배움이 또 있을까.
우리가 사는 능력을 갖는다는 것은 내 인생의 ’부‘를 축적한 결과로 검증된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대비가 되었는지, 정신은 온전한지, 육체는 믿을만한지, 사회적 관계는 신뢰로운지 이 모든 것들이 ’부‘라는 한 단어로 대변된다. 성공학의 대가로 불리는 ’지그지글러((Zig Ziglar)‘는 ’반복된 습관‘을 이렇게 표현했다. 누군가를 절름발이로 만들려면 2달 이상 목발을 짚게 하라. 반복은 멀쩡한 육체도 절름발이로 만든다.
우리네 교육이, 내가 살아온 환경이 혹시 나를 논리의 아집, 지식의 오류, 판단의 불급을 지닌 이성의 절름발이로 만든 것은 아닐까. 더 크게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책은 이렇게 절고 있는 내 이성에 질서를 만들어 준다. 독서의 반복에 새벽의 기운까지 보태면 이 질서는 더 제대로, 굳건하게 잡을 수 있다. 내가 성공을 위해 새벽독서를 추천하는 이유는 정량적으로 어떤 결과를 보여줄 수는 없지만 우리는 안다. 정량화된 것은 비정량적인 것으로부터, 물질화된 것은 비물질의 것으로부터 도래한다는 것을.
새벽독서의 비정량화된 반복의 축적은 분명 내게 어떤 순간 정량화되어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그 무언가로 내게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이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누구라도 자신의 인생에 필요한 자원을 획득하는 것을 알려줄 수 있다. 가장 지루하지만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하지만 단단하게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지는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나를 성공시킨다. 오로지 나여야 하고 나밖에 없다. 내가 먼저 내 하루를 선용(先容)한다면 내 인생은 세상의 조화를 위해 선용(善用)될 것이다. 그 하루의 시작이 새벽이고 그 새벽에 나를 키우는 방법은 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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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글로벌경제신문(http://www.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