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시력은 지력에서
* 본글 '부, 그 사유와 실천'은 현재 '글로벌경제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지담의 컬럼입니다.
가래나 이도 우리 몸에서 생겨난 것임을 알지만,
쓸모없는 것인 이상 될 수 있는대로 멀리 내다버려야 하거든.
- 그리스철학자열전 아리스티포스편
매일 새벽 책읽기를 하루 루틴으로 시작한지 3년. 이 작은 시간들의 축적은 결코 적지 않은 시간들로 채워지고 이러한 양적증가는 질적승화를 일으킬 것을 나는 믿는다. 지루하게, 치열하게 반복되는 이 시간을 꾸역꾸역 지켜내는 이유가 오늘 새벽 이 글귀 하나로 정리되었다.
가래나 이같이 우리 몸에서 생겨났지만 쓸모없는 것들을 내다 버려야 하듯 바보같이 미숙한 나는 내 몸에서 무엇이 쓸모없는지를 가늠하지 못한다. 기준이 없으니 쓸모있는 것도 제대로 쓸 줄 모르고 쓸모없는 것도 마냥 쌓아놓기 일쑤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는 방식은 2가지다.
사고방식, 그리고 행동방식.
어떻게 사고하고 어떻게 그 사고를 육체로 드러내느냐가 내 삶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삶을 점으로 쪼갠다면 아마도 사고하고 행동하고 사고하고 행동하고가 모여서일텐데
문제는 어떻게 어떤 사고를, 어디서 어떤 식으로 행동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 삶의 난해함과 복잡성, 다양성에서 필요한 것일텐데
많이 아는데, 열심히 행동하는데 삶이 나아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사고와 행동의 가래나 이가 많이 쌓여서가 아닐까.
결국, 나의 사고와 행동을 강제로라도 진화시켜줄 수 있는 무언가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나는 그것이 진정한 삶의 공부라고 여기며 그 공부를 위해 책을 읽길 권한다.
책은 다독하거나 정독하는 것보다 유익한 책을 읽는 사람이 훌륭하다(그리스철학자열전 아리스티포스편). 여기서 또 문제는 ‘어떤 책이 나에게 유익한가’ 이다.
이런 면에서 다독은 충분히 책선정에 필요한 요소일 수 있고 정독 역시 어딘가의 지점에서 나의 사고의 변화를 강제로 유인할 수 있는 시간들일게다. 그렇다면, 다독과 정독은 제대로 책을 선정하기 위한 기초작업이라고 해야 맞을까?
어떻게 제대로 책을 읽는지에 대해 나는 배우지 못했기에 책 속에서 헤매던 시간이 수년이다. 지금도 물론 그 길목 언저리에서 방황하고 있겠지만 적어도 수년간의 새벽독서의 축적은 나에게 다독의 시점, 정독해야 할 책, 나를 강제로 진화시켜줄 책을 선별할 수 있는 작은 능력을 선물받은 것 같다. 분명히 하루 1~2시간, 3년간 쌓아온 이 시간은 지속적으로 나에게 선물을 주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 선물은 비단 책선택의 기준을 너머 내 사고와 행동의 가래나 이같이 쓸모없는 것들도 나에게서 버리게 도와준다. (좀 읽기에 더러운 느낌이 들겠지만) 가래도 보이지 않는 내 안의 염증의 신호이고 이도 나의 불결함의 증거이니 나의 사고와 행동 역시 보이지 않는 것들의 현실화라는 관점에서 우리가 점검해야 할 대상은 보이는 행동을 수정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나의 사고를 들여다보는 시력이 필요한 것이다.
나의 다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나의 꿈이요,
나의 손을 분주하게 이끄는 것은 나의 열정이요,
나의 체력이 소진되는 것을 외면시키는 것 역시 무언가에 몰두해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자는 보이는 것을 갖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힘을 알지 못하는 자는 설사 보여짐이 화려할지라도 그것이 곧 소멸됨을,
반면, 보여짐이 흉할지라도 그것이 곧 성숙될 것을 경험할 것이다.
진짜 좋은 시력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의 힘이다.
이 눈의 힘, 즉, 시력은 아는 것의 힘, 지력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지력은 책으로 기를 수 있다!
그래서, 내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면 독서에 투자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출처 : 글로벌경제신문(http://www.getnews.co.kr)
https://www.get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90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