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에게는 개가, 돼지에게는 돼지가
* 본 글 '부, 그 사유와 실천'은 현재 '글로벌경제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지담의 컬럼입니다.
나의 경우, 집이 연구실이자 작업실이다. 집순이를 너머 방순이 수준이라 거의 외출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를 만나고자 할 경우 일단 나의 집에서 만나자 제안한다. 나만 편하지 상대에게는 부담인 것은 알지만 그래도 그 부담이라는 감정은 잠시일 뿐, 집에서 만나길 잘했다.라고 돌려보낼 수 있기에 나는 굳이 집에서 만나길 고집한다. 그리고 먼저 꼭 이렇게 말한다.
"암것도 사오지 마시고 굳이 사올거면 1글자로 된 것만 사오셔요"라고.
"그래도 어떻게 빈 손으로? 1글자 뭐요?"
"집, 금, 땅, 차, 돈. 뭐 이런 거.? 그런 거 안 사 올거면 빈손으로 오셔야 해요"
아무것도 사오지 말고 그냥 편하게 빈손으로 오라는 의미인데 재치있는 이들은 가끔 "귤, 김, 떡, 빵" 같은 걸 사오기도 해서 한바탕 웃으며 맛있게 나눠 먹기도 한다.
이런 대화가 나에겐 일상이지만 누군가에겐 뜬금없는 요구였을 것이다. 집으로 방문하는데 집, 땅, 돈, 차를 사오라고? 우습기 그지없고 누가 들어도 농담 그 자체여서 이 대화는 그냥 웃고 넘기는 가벼운 대화에 그친다. 혹시 김주원이는 ‘자기 집에 올거면 집사오래.’라고 오해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를 우려하는 것 자체가 상식을 비껴나니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낫겠다.
농담처럼 한 말이지만, 실제 나는 물질적인 것들을 좋아한다.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평생 살아야 할 내 집도, 내가 앞으로 살고 싶은 집을 지을 땅도, 그 땅을 마련할 돈과 같은 자원도 모두 내게 필요하다. 더 나이 들어 손주들이 생기면 대학등록금도 척척 내주는 할머니가 되고 싶고 내 죽을 때까지 자식들에게 손 벌리고 싶지가 않다. 아직 준비가 미흡하니, 게다가 없으니 갖고 싶고 갖고 싶으니 갖기 위해 방법을 모색하고 방법을 찾으려니 매일 ‘새벽독서’라는 수단에 집착하는 것이다. 가지지 못했으면서 갖고 있는 자를 부러워하거나 자기도 없으면서 가지려 하는 자를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가져야만 하고 갖고 싶으면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그 방법을 될 때까지 해보는 것이 나는 옳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돈’을 좋아하는 내가 된 것에는 ‘내가 돈을 터부시하면 돈도 나를 터부시한다.’는 요즘말로 ‘현타’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계기에 두드려맞은 현타였던간에 언제부턴가 ‘돈’에 감정을 이입하기로 했고 이러한 나의 언행이 ‘돈돈거린다’는 오해를 불러오기도 하지만 게의치 않는다. 오해를 하는 자는 ‘돈을 좋아하기로’ 여긴 나의 이면이나 과정을 무시한 현상만을 보는 ‘가난한 시력’을 지니고 있기에 그저 그런가보다. 넘겨버린다. ‘돈’으로 대변되는 자원은 나에게 (아니 우리 인간에게) 꿈이요, 바람이요, 희망을 현실로 바꿔주는 ‘힘’이다. 에머슨이 강조한대로 ‘인간이 기본적인 생존을 너머 무언가를 추구하기 위해 태어난’ 의무를 다하게 해주는 물질인 것이다. 이를 좋아하지 않고서 어찌 이것이 내게로 오길 바라겠는가!
그렇다면, 나의 꿈을 위한 자원획득방법이 왜 새벽독서냐? 명확한 2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 책은 나에게 스승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려면 부자를 만나야 하는데 내 주변은 다 나와 비슷비슷하다. 그런데 간접적이지만 책에서는 많은 부자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의 면면을 모두 알 수 있고 사고의 진화도, 위험에 대처하는 방법도, 자원을 획득하는 수단도, 나아가 ‘돈’에 대한 철학과 ‘부’에 대한 기본을 모두 알려준다. 그것도 실제 경험을 통해, 진심으로 내게 알려준다. 이 수많은 지식과 지혜 앞에서 나는 절제를, 통제를, 규제를, 조절을, 조화를, 인내를, 예의를, 선과 악을, 속성을, 본질을, 이면을, 개념을, 인간을, 생명을, 공동체를, 기운을, 그리고 진정한 배움의 가치를 배워나간다. 내가 ‘부’를 이루는데 이만한 지름길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둘째,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껏 내가 내린 결론, 지금껏 내가 행한 결과가 지금 나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선 지금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내가 되어야만 하고 새로운 나는 지금의 내가 모르는 나다. 따라서, 내가 나를 외면할 때 세상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고 시선을 돌린 그 곳으로부터 세상의 기운을 받아낼 수 있다. 새로운 내가 된다는 것은 ‘창조’를 하겠다는 의지다. 이 창조의 기운은 새벽, 태양이 뜨는 시간에 가장 강하기에 나는 굳이 ‘새벽’+‘책’을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에게 만족하여 멋지게 태어났다고 믿고 있지만,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네. 왜냐하면 개에게는 개가, 소에게는 소가, 당나귀에게는 당나귀가, 또한, 돼지에게는 돼지가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네 - 그리스철학자열전 플라톤편-
나 역시 인간이기에 인간으로, 김주원이기에 김주원으로 아름답게 세상에 남길 바란다. 게다가 나에게도 내가 가장 멋지게 보이길, 그렇게 만들 수 있는 내가 되길 바란다. 새로운 나로, 더 변화된 나로, 멋진 나로 거듭나길 원한다는 것은 지금의 내가 맘에 들지 않음을 전제한다. ‘용기’가 필요한 것은 ‘두렵기’ 때문이듯 더 나은 나로의 변화와 혁신과 창조는 지금의 나를 외면해야 함을 전제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1글자들을 나열하며 개에게는 개가 멋지듯, 인간에게 멋진 내가 되기 위해 이 1글자들이 나의 육신과 영혼을 채워주길 바란다. 첨언하자면, 내가 1글자를 좋아하는 이유는 언어의 본성에는 분명 그 의미가 담겨 있는데 그 커다란 의미가 얼마나 집약되고 압축되었으면 1개의 글자에 다 담길까 놀라워서이다. 그래서, 셀 수 없이 많은 언어들이 있지만 이 1글자를 우선적으로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심을 부리기로 했다.
재작년에 발간한 나의 책 ‘리얼라이즈’에서도 언급한 대로 나의 성공을 위해 내 몸으로 체화되길 바라는 1글자는 뜻/꿈/책/땀/벗/촉/틀/돈/격/운이다. 내가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의미에서 좋아하는 1글자는 격/결/곁이며 내가 주의하는 1글자는 손/눈/말이고 내가 누구에게든 주고 싶고 받고 싶은 1글자는 정/책/글이며 내 육체를 위해 가장 신경쓰는 부분은 물/쌀이다. 또한, 내가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찾아가고 또 찾아가는 1글자는 해/달/별/산/강/꽃이며 마지막으로 내가 유일하게 책임져야 하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다. 이렇게 ‘선’을 추구하는 ‘나’로 나를 먼저 만드는 것은 수없이 나의 인생에 진입하는 ‘너’를 위해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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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글로벌경제신문(http://www.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