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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Feb 11. 2024

글과 말은
'언어'를 너머 '혼(魂)'의 공유

‘사유’과 ‘사색’에 대하여

나는 다른 사람들이 무언가를 탐구해 놓은 것들을 탐구하는 것보다 나 스스로의 힘으로 어떤 근거들을 찾고 여기저기를 연결시켜서 새로운 모양새를 만들어내는 것에서 커다란 지적만족감을 느낀다. 타고났다기보다 욕구가 그 쪽으로 한 번 쾌락을 느끼더니 계속 그리로 가려는 듯 하다.     

 

논문을 쓸 때도, 글을 쓸 때도 나만의 방식으로 나만의 주제로 내가 흥미를 느껴 혼자 여기저기 뒤적뒤적 형식도 내가 만들고(어쩌면 형식은 개의치 않고) 그저 결론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 인과는 어떻게 연결지을지, 그래서 근원은 무엇인지를 파헤치는 재미로, 늘 형식없는 관념적인 글들에 빠지고 그렇게 쓰게 된다.  

   

이제 19일이 되면 

새벽독서 딱 5년. 

그 동안 내가 탐구하며 발견한 근거나 사고의 연결고리에서 탄생한 명제들을 누군가의 글에서 만나게 될 때 나는 마치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사람마냥 흥분을 가라앉히기가 힘들 정도로 '와우! 나도 알아냈는데!' 괜한 동류의식도 느끼고 '내가 알아낸 게 맞구나.' 싶어 가슴 저 깊은 곳으로부터 안심과 안도가 차오르는 황홀감도 경험했다.     


그러다가도 내 못된 심보는 '에이, 나만 아는 줄 알았는데', '에이, 내가 젤 먼저 발견한 줄 알았는데'... 오묘한 질투와 함께 글의 소.주제거리가 하나 줄어든 것에 입을 삐죽거리기도 했다. 내 지독하게 깐깐한 양심은 내가 탐구한 것이라 할지라도 책을 읽다 눈에 띄면 괜시리 훔치는 듯하여 그냥 갖다 쓰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거기까지 도달했음에도 인용이나 발췌를 적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선지 더 묘하게 등장하는 질투심을 금새 가라앉히지 못해 아쉬워하고 게다가 또 다른 명제를 찾아내야 하는 숙제를 스스로에게 떠안기고야 만다. 여하튼 이런 날들이 하루이틀 많아지면서 내 감정은 하늘 저 위에서 춤추다가 땅속 저어기 깊이 침잠했다가 좀처럼 내가 컨트롤이 안될 때가 많아졌다.   

  

새벽독서 3년정도 지나서부터였을까...

나의 독서에 가히 

용기있는 태도들도 생겼다. 

어떤 책은 책장을 열어 몇 페이지를 읽다보면 읽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 책을 덮을 때가 있다. 내가 쓴 책 역시 내가 읽으면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게 써놓은지라 책의 저자를 비하하는 경솔한 발언은 결코 아니다. 내 지성에는 이미 덮은 책의 내용 정도는 인지되어 있다는 확신, 또는 설사 살짝 다르게 인지되었더라도 그 정도는 여러 가지의 혼합과 연결로 인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는 된다고 스스로를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안 읽어도 되겠다.. 싶을 때 나의 이쪽이성은 시건방을 떤다 하고 저쪽이성은 나의 용단을 자부하게도 하지만 양쪽이성이 싸우거나 말거나 나는 내 판단과 느낌에 따를 용기정도는 이제 가졌다고 본다. 


그런데 안읽어도 되겠다 싶어 덮은 책들보다 읽기 어려워 덮어야만 했던(미루는, 기다리는) 책들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덮어두었던 책들이 어느 순간 술술 읽혀졌던 경이로운 순간도 경험했다. 올더스헉슬리가 그랬고, 뤼디거달케가, 김우창이, 애덤스미스가, 니체가, 데카르트가 그랬으며 지금은 프루스트가, 니체가, 한나아렌트가 그리고 난해했던 시들이 내 부족한 지성에 다시 노크하는 책들이다.     



그래서 '이해'라는 단어는 내게 너무나 두려운 단어가 되었다. 이해된 줄 알았는데 이내 더 큰 지식 앞에서 꼼짝 못하는 나를 금새 발견하게 되니 말이다. 이해는 모든 감각 제외시키고 오로지 내 인식의 작용으로 대상이 수용되는 정신운동이다. 

   

못 읽어내는 문구들과 마주할 때 어렴풋하게 이해하고 넘어가기엔 너무 찜찜해서 여러번 읽어도 보지만 여전히 모자람만 들통나는데 이럴 때 많이 난감하다. 모른 채 그 다음으로 넘어가야 할지 그 자리에서 멈추고 다른 책을 펼쳐야 할지 아무 것도 읽지 않고 그냥 정신을 좀 쉬게 냅둬야 할지 나는 늘 곤란하다. 그래도 이런 경우가 잦다 보니 이제는 크게 고민하진 않고 감각에 따른다. 어떤 때엔 덮고 어떤 때엔 몰라도 계속 읽는다.

 

걱정되는 것은, 이럴 때 나의 감정이 조급해진다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정신에서 발견되었을 때 나는 그것을 알고 싶어 속도를 내다가 어느새 나를 들들 볶아대기 때문이다. 이건 어쩔 도리가 없다. 그냥 감정이야 조급하든말든 지식을 쌓아가며 양을 늘여 지식의 틈을 메우는 수밖에. 조급하다는 것은 곧 여유가 다가온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이제 나는 안다. 

지성의 틈새가 다른 지식으로 채워진 후 다시 그 부분을 읽으면 너무나 명쾌하게 인식되면서 

'아 그 때 나는 그 정도였구나'를 알게 되고 '이번에도 이렇게 배우는구나' 한다. 


또, 내 정신은 내 속 어디에 숨겨진 지 모를 지식들을 꺼내는데 시간이 필요한 것도 같다. 다른 지식이 틈새를 채우지 못해도 한쪽 머리에 모르는 그것을 냅두면 며칠 뒤, 같은 글귀지만 너무나 단순하게 이해되는 것을 자주 경험한지라 '정신에도 시간을 줘야 하는구나.', '내 인식력이 약했던 것은 아니었구나하며 안도하고 정신을 위로한다.  

   

그리고, 다행인 것은 이러한 앎 덕분에 모르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뭘 더 공부해야 할 지 허둥대는 꼴이 이제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모르는 부분과 맞딱뜨리면 놀랍고 난감하긴 해도 곧 엄청 찐한 쾌락을 몰고 오니

이 순간이 오면 일단 '또 올 것이 왔구나!' 웃으며 환영하는 걸로 정리해본다. 

또 나를 그 자리에서 꼼짝못하게, 책장을 넘기지 못하게 하는 그 문장이, 그 문단이, 그 책이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어 이제 

날 이해시키기 위해 등장한, 날 감동시키기 위해, 멍한 날 깨우치기 위해 등장한 그 지점에 이르면 난 오히려 기쁘기도 하다. 

감사가 커지고 그만큼 충만감도 배가 된다.     


늘 할아버지처럼 뒷짐지고 걷는 나는 조용히 이런 감정들을 달래고 다독거리고 감사히 느끼면서 나로부터 솟아난 능동적 탐구책으로부터 내게 온 수동적 탐구에 하염없이 빠져든다. 


이를 근사하게 

사색

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사색, 별 게 아니었다

나를 내 정신 속에 빠뜨려

그 속에 탑재, 난재혼재되어 있는 

무질서한 파편들을 찾고

그것들을 제자리에 앉혀가며

질서 잡아가는 것...


다리는 동네어귀 골목길을 걷고.

사색은 정신속 사유의 길을 걷고.     

그렇게 '길'을 만들어 걷는 것....

니콜라스나심탈레브가 자기는 ‘천성이 게을러서 사유하고 사색하며 노닐기 위해 노동형 인간이 아닌, 아이디어형 인간이 되기로 결심했다(주1).'고 고백한 것 마냥, 


데카르트 '어떤 책을 읽기 전에 자신의 성급한 독서로 인해 자신이 발견하는 기회를 빼앗겨 자신의 순진무구한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 같아 책을 잡기 전에 망설(주2)'이는 것 마냥, 

일정부분 나도 그렇다.    

 

트레이닝복에 운동화 신고 뒷짐지고 슬슬 운동삼아 동네한바퀴 도는 나는 내 머리속으로 들어가 한참을 그 안에서 여기뒤적, 저기뒤적거리며, 말 그대로 장난을 논다. 그러다 보면 비좁고 귀찮아진 내 정신은 성가신 것들을 선심쓰듯 머리밖에서 툭툭 던져버리는 데 나는 냅다 이것들을 혀에 담아 핸드폰의 녹음기로 옮겨버려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나 집에 와 들어보면 우습기 짝이 없는 것들이 대다수이고 도대체 뭔 내용을 녹음했는지 내가 못알아듣기도 한다. 여전히 내 정신은 질서가 없지만... 괜찮다. 개념이나 정의나 명제들은 서로의 연관성에서 단순화된 것인데 사색하는 어느 찰나에 툭 튀어나온 녀석들은 맥락, 즉, 기둥과 줄기는 기억에 남긴 채 잔가지만 녹음해 놓은 것이니 내 정신이지만 내가 모를 수밖에.      

이렇게 여러번 내 녹음을 내가 못 알아듣자 내 기억력이 슬슬 나이값을 하는 것 같아 신경질이 나기도 했고 그래서 최근엔 이쪽에 저장된 것이 저쪽과 연결될라치면 기억에서 빠져버리기 전에 서둘러 이쪽에서 저쪽까지 죄다 녹음 또는 메모하느라 걸으면서도 혀와 손이 분주하다.  


요즘 들어 더 자주 이런다. 이 놈의 정신이 언제 어디서 자신에게만 집중해 달라고 땡깡을 부릴지 몰라서 내 다리와 손가락은 늘 대기중.     

 

식사를 하는건니 사료를 먹는건지 

왜 여기서 저기를 뛰어가야 하는지 모른채 

늘 그렇게 신체는 정신에 가혹하게 희생당한다.

게다가 하루종일 제 용량이상으로 움직여댄 정신은 

영화 한편보고 싶은 내 심정도 몰라주고 어떻게든 영화를 다 보고 싶어 잠을 떨치려는 내 신체도 몰라주고

'죽음의 친한 형제인 잠'에 나를 인계해버린다. 


그럼 뭐하나? 

자면서도 연신 툭툭 나를 건드려 깨우는데...

이는 사색하기에 내 머리통이 너무 비좁은 탓이다.     

그래도 괜찮다.

나의 사유의 길이 아직은 좁구나를 확인한 것이니까.


차가 많아지면 도로를 넓히듯 

사유의 길도 사색의 속도와 양이 증가하면 더 크고 길고 넓게 확장되겠지.

그러고 보니 도로공사의 주체도 나구나.

때가 올 것이라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나는 글을 쓸 때 근거를 제시하는 습관이 있다. 근거가 없다면 지식 탐구의 기본인 연역(演繹)에서 일단 배제되기 때문이거니와 근거 없는 주장은 여러 반론의 소지를 안고 가기 때문이다. 반론이 두렵다기보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하는 떠벌이가 되기 싫기에 내가 새로운 무언가를 주장하려는데 근거를 찾기가 어렵거나 근거 자체가 없다면 가장 기본적인, 더 이상 파헤칠 수 없는 관념론을 근거삼거나 근거를 이미 찾아놓은, 내가 충분히 따를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성현들의 주장을 근거삼는 쪽을 택한다. 

     

찾은 근거에 의해 이것이 저것으로 연역되도록 연결짓고 

이쪽과 저쪽의 상관짓기에 있어 하나하나 연역을 거슬러가며 

순서대로 열거, 배열함으로써 나름의 추론을 만들어간다. 

그게 논리라고,

논리가 있어야 글에 힘이 있다고,

글에 힘이 있어야 읽는 이들의 눈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전해져

'공감'을 일으킨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글과 말은 

'내 정신의 발현(發現)'이기에 

언어의 전달이 아닌

혼의 공유

라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글을 쓰는 것은 읽히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나는 쓰는 입장에서 즉, 나의 '글쓰는 이유'가 절실할 때 읽히기 위한(읽혀도 되는) 용기가 생긴다. 

그래서, 

나의 글이 내게 허락받는 과정

내가 나의 글에 갖춰야 할 자격은 

상당히 까다롭고 냉정하면서도 어떤 때엔 흔쾌하게 직관적이다.      


나는 비록 지금 여기 서 있지만

나는

글로 세상에 내 배움을 전하고

이를 위해 사유의 길에서 사색하고

사색하는 내내 제대로 인식되도록 내 인지력을 총동원해 인식된 그것들을 정돈하고

정돈된 그것으로 내 사상의 궤를 만들 수 있기를,


그래서

내가 나로써내 것으로써세상에 내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내가 그랬듯이 누군가도 그렇게 자기 목소리로 세상에 당당해지기를.   

  

이 바람을 이루려 가는 길,

이 바람이 이뤄지는 길,

이 바람이 현실로 서 있는 길이 나에겐 

사유의 길이며

사색의 이유다.     


주1> 블랙스완, 니콜라스나심탈레브, 차익종 김현구 역, 2018, 동녘사이언스

주2> 방법서설, 데카르트, 이현복역, 2006,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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