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에 대하여
삶은 경험의 연속이다. 행동의 입체인 '경험'이 내 정신에 길을 내고 그 길의 속성에 따라 내 삶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건설된 정신의 길은 감정의 기후변화에 따라 성질을 갖춘다. 이러한 행동, 정신, 감정의 순환에 대한 더 입체적인 경험은 더 넓고 길고 굳건한 정신의 길, 즉 사고체계를 형성하게 되고 이를 인식이라, 지성이라, 인지라 부르며 나의 행동을 조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은 인간의 사고체계에 길을 내고 길을 단장하고 길을 허물기도 하는, 내 정신의 질서를 담당하는 충실한 수행비서라 할 만하다. 그래서, 경험의 지표가 될만한 누군가를, 무언가를, 어딘가를 찾아 다니며 '경험을 위한 경험'을 위해 우리는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이미 자리잡고 있는 지식은 경험으로 틈새가 벌어지고
그 벌어진 틈새를 감지해 재단장된 사고(思考)는
내 인생의 방위를 결정하고
결정된 방위를 기준으로
내 인생은 거대한 궤도를 만들어간다.
따라서, 작든 크든 새로운 경험은 궤도를 위한 궤적이라 하겠다.
나는 인생의
이라 여긴다.
이 신념에 기준하여 스스로가 수용한 사회적 질서들, 도덕이나 법률, 예의 등이 굵은 기둥에 부착된 가지가 되어 나의 사고와 행동방식으로 표출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2가지의 방식, 즉,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의 수행은 이 사명을 위해 신념을 중심으로 창출된 굵은 가지이다.
그런데, 나무를 키우다 보면 중심이 되어줄 가지에 나도 모르게 기생되거나 반강제로 주입되었거나 미운 모양새로 자라나는 가지들도 많다. 가령, 윤리적 강제성으로 부여된 도덕률, 사회질서에 반하지는 않지만 미심쩍은 암묵적인 룰, 인간사이에서 지켜야 할 예(禮)로 위장된 다양한 경우들, 규율과 규칙, 관습, 형식, 절차라 통용되는 것들이겠다. 이것들은 내부 사고체계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거나 또는 외부에서 기생시킨 가지일 뿐 신념과의 결부여부는 경우에 따라 유동적이어야 한다.
신념이 굳건하게 기둥으로 자리잡혀 있고
신념이 탄생시킨 사고와 행동방식이 거대한 가지로 자리잡힌다면
반강제적으로 부착된, 기생된, 병들거나 미운 가지들은 시대와 시류와 자리에 따라 재배치가 가능하도록 요령(要領, 일을 하는데 필요한 묘한 이치)을 지닐 것이다. 마치 키 큰 대나무의 중심기둥(신념)이 그다지 굵지 않지만 아주 단단하여 옆으로 뻗은 중심 가지(불변의 사고, 행동방식)들이 심한 바람에도 휘청거리지만 부러지지 않으며 위로위로 자신을 키우며 떨어져 나가는 것(가변의 사고, 행동방식)들은 미련없이 바람에 날려버리듯 말이다.
모죽(毛竹, 대나무)은 제 아무리 기름진 땅에 심어도 5~7년간은 죽순이 트이지 않는다. 이 때 왜지? 싶어 땅을 파면 죽어버린다. 그냥 기다려야 한다. 그 인고의 시간이 자신의 인생의 궤도를 그리는 과정이다. 그러다가 5~7년이 지난 어느날부터 하루 70cm~1m씩 하늘로 뻗어 올라간다. 그렇게 6주 정도가 지나면 무려 그 키가 30m를 훌쩍 넘는다. 이 중심기둥이 신념이다.
자신의 방위가 위로 정해지고 그렇게 위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전진시키는 준칙. 이 과정에서 기둥에는 굵고 단단한 가지가 형성되고 또 거기서 다른 가는 가지들이 서서히 자라기도, 자라다가 부러지기도, 외부의 힘에 파괴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가지들이 시대와 환경에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관습이나 도덕률, 원칙들이다.
신념은 항시 강력하게 불변의 기둥으로 서 있고자 하지만 때론 강제적으로 부착된, 경직된 가지들의 투쟁으로 신념의 에너지는 흡입당하기도,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느닷없는 강력한 비바람에 상처나고 부러지기도 하기에 우리는 수목(樹木)주머니와 같은 장치로 중심에 있어야 할 그것이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요령있는 여지를 두어야 한다. 내 정신은 이러한 '요령'을 가장 역동적으로 해내야 할 주체다.
즉, '요령을 겸비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쉼없는 정신의 활발한 역동성, 이로서 명령받은 행동의 입체인 경험이다. 또한, 이 활발한 운동에는 고려(考慮)가 필요한데 과연 자발적인 것은 무엇이며 비자발적으로 복종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가늠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의식적(자발적)으로 지적활동에 포함시킬 것인지, 나도 모르게 복종당하고 있었던 지적활동은 무엇이었는지 스스로 파헤쳐보는 시간을 자신에게 할당해야 한다. 신념이 기준으로 자리잡고 있으면 경험이 이를 분별해준다. 수목주머니로 양분을 보충하면서 살리고 키워야 할 가지와 떨궈야 할 가지를 경험으로 스스로 검수해야 한다는 의미다.
방위가 사명이고,
방위를 향한 굳건한 기둥이 신념이며
거기서 자라난 굵은 가지가 불변의 사고와 행동방식이어야 하고
떨구거나 수시로 교체해야 할 가는 가지가 외부로부터 자기도 모르게 주입된 가변적인 인식과 관습, 예의, 경우들이며
경험이 부착을 유지할지 떨궈야 할지를 판단하게 할 근거이자 증거이다.
한마디로,
신념이 의식의 확장으로 굳건해지는 것과 동시에
수많은 인식의 가지들을 형성, 파괴시키는 과정을 자체적으로 거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정신의 역동적 활동이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수고스러운 경험의 반복은 수목주머니의 주사바늘을 꽂거나 빼버릴 과감한 힘을 내 안에서 탄생시킨다. 인식을 수용할지 파괴할 지 결정할 힘이 내 안에서 생기게 된다. 또한, 무의식적으로 자라나는 사고와 경험의 운동성을 우리가 '습관'이라 부른다면 이 습관이 나의 의식적 활동의 결과인지 아니면 무의식적인 복종의 결과인지를 스스로 검열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간파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자신의 보이지 않는 신념이라는 기둥에는 이미 침범해 있는 무리와 새롭게 침입할 방해물들이 항시 곁을 노리고 있기에 스스로가 검열하지 않는다면 서서히, 아니 어쩌면 순식간에 생명력을 잃을지도 모른다. 침범당한 신념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911사태와 같은 사건사고, 독재자들의 반인륜적인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미 수없이 목격했으며 개인으로 시선을 옮겨도 자신의 과거 속에 자기도 모르게 자리잡힌 인식으로 무언가를 판단하고 거부하고 재단했던 경험은 누구나 비밀스럽게 하나씩은 지니고 있을 것이다.
신념이 선(善) 또는 악(惡)으로 표출되는 힘은 신념자체의 잘못이라기보다 신념이 자신의 인생궤도에서 벗어나는 것을 차단하지 못한 나의 검열의 게으름때문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자 한다.
신념이, 즉 중심기둥이 외부의 잔가지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도 수목주머니로 영양을 채워주거나 뿌리째 이식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한 나의 잘못인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복종당하고 있는 활동은 그것이 가진 경직성에 의해 자신의 자유로운 판단의 활로를 막아버려 자기가 자랄 키만큼, 자기가 창조해야 할 열매만큼 그 양과 질을 충족시키지 못하게 하는 해충과 같다.
해충도 스스로의 삶을 위해 치열하게 기를 쓰고 있을텐데 나에게로 침입하는 비바람과 해충을 막을 수 없을지라도 적어도 검열의 희생을, 박멸의 고통을, 치유의 인고를 자신에게 부여하여 해충이 자신의 궤도로 전진하여 훼방놓을 길목은 차단해야만 한다. 이러한 차단은 나의 신념이라는 기둥이 사명이라는 방위를 제대로 향하도록, 그렇게 내 삶의 궤도를 만드는 정신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운동이다.
신념을 정립했다는 것은
내 삶이 걸어가야 할 거대한 길목을 터놓았음이며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검열의 냉정함으로써 희생과 포기와 각성과 인내로 그 길을 걷고 있음이며
신념을 누린다는 것은
내 정신의 활발한 활동이 주는 역동성에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