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론(利己論) - Ch3. 해체, 그리고 脈!
[이기론]의 CH1. 나는 나를 해체하기 / CH2. 나를 해체해보니가 끝나고.
오늘은 CH3. '해체, 그리고 脈!' 2편입니다. 따라서, 지난 글들을 먼저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나를 해체하고 나를 다시 발견하고 그리고 잡은 중심맥 가운데 대표되는 1st 명제는 이것이다.
나의 모든 일상은 상당히 이기적이다. 릴케(주1)의 표현대로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자신으로만 존재하도록 자기에게만 전념하는 분수같은 존재'가 된 듯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나를 나에게 집중시키고 나로서 살려 하는 기저에는 나의 이기가 쌓이고 쌓이고 또 쌓여 충만해질수록 나로부터의 이타도 커진다는 원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이 명제를 수년 전 어설프게 주장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가물거리지만 당시 호되게 욕을 먹었던 순간의 기억이 이 명제를 더 파고들게 한 계기가 되었었는데 잠깐 얘기하고 넘어갈까 한다. ‘어떻게 교수가 사람들에게 이기적이 되라고 가르칠 수 있느냐?’라며 내 얼굴 앞에서 붉게 열을 올리며 나에게 따지고 물었던 한 사모님. 난 여기서 그녀를 사모님이라고 칭할 수밖에 없겠다.
사회적으로 다소 지명도가 있는 남편을 둔 덕에 그녀는 항상 당당했고 공개적인 모임에서도 남편이 자신을 챙기게끔 지시하면서 그런 자신의 모습에서 오히려 어깨에 힘을 주던 사람이었다. 모임이 끝나면 늘 조용히 나를 불러 가방에서 주섬주섬 알록달록 예쁜 주머니를 하나 꺼내어 보여주며 ‘이건 어느 나라 방문했을 때 00가 준 것인데 김교수한테 딱 어울릴 것 같아서 가져왔다’며 나에게 몰래 건넸다.
그 때마다 거절했더니 자신의 성의를 너무 무시한다며 오히려 화를 내었던, 그러다가 어느 날 그녀는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고 집에 있는 다양한 –그녀의 표현에 의하면, 아무도 보여준 적 없는, 귀한- 것들을 이제 자신은 늙어서 착용하고 다닐 수가 없으니 예쁜 김교수가 하고 다니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딸은 없고 며느리만 있는데 며느리는 미워서 주기 싫다면서.
내게 관심주시는 것과 초대는 너무 감사하나 (그녀와 나란히 앉아 값을 매기며 액세서리를 보고 감탄하는 내 모습이 도저히 허락지 않아서) 거절했고 이 거절이 결정적으로 그녀가 나에게 ‘내 이럴 줄 알았다.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여러 번 내가 참았는데 어떻게 이기적이 되라고 가르칠 수 있느냐, 너같은 사람은(대뜸 반말로 이어졌다)... 블라블라...’. 결국 나는 그녀와 거리를 두기로 하였다.
예의는 차리되 마음에 꺼림칙한 염려를 안지 않겠다는 나의 태도가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다. 결이 다른 분과 마음까지 나누기에 나의 포용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다행히 그 분의 욕바가지가 듣기 좋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염두에 둘 사안도 아니어서 거의 상처를 받지는 않았다. 단, 그 날 이후로 '이기가 이타'라는 나의 주장에 대한 근거와 설득력있는 표현이 필요하다는 것를 알게 되었고 더 오랜 시간 이 명제를 내 입과 손으로 꺼내는 데에는 깊은 숙고를 해야 했다는 것에서 나는 그녀에게 아주 깊은 감사함을 지니고 있다.
내가 아는 것, 믿는 것, 표현하는 것과 상대를 이해시키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이해가 안 되어 나에게 손가락질하는 모든 상황은
상대의 무지와 이해력 부족이라기보다
논리와 근거를 찾아 연결지어 표현하는 단련 부족이기 때문이다.
모든 현상과 상황에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내가 비판받고 심지어 듣기 거북한 말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 상황은 내 인생에 뭔가 가르쳐줄 것이 있어서 그 지점에서 등장한 사태이니 나는 상황의 본질을 보는 눈을 더 키워야 함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내가 관여된 모든 상황은
'나'로부터 비롯되기에
'나'로부터 근원을 찾으면
'나'로부터 상황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1st 삶의 맥(脈)으로서 나는
임을 거론하려 한다.
이기,
자신을 먼저 이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자신을 비롯한 타인, 전체를 위한 선(善)의 시작이자 기본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한 노력과 성숙이 긍정적 공명을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니체(주2)의 글을 빌어 내가 주장코자 하는 이기의 진정한 의미를 독자들이 공감해주길 바란다.
너희들은 모든 부를 너희 영혼 속에 쌓아두려는 갈망을 갖고 있다. 너희 영혼은 만족을 모른 채 끝없는 보물과 보석을 갈망하고 있다. 너희들의 덕이 만족을 모른 채 끝없이 베풀려 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일체의 사물을 강요하여 너희들에게, 너희들 속으로 흘러 들어오도록 한다. 그것이 너희들이 베푸는 사랑의 선물로서 다시 너희들의 샘에서 흘러나가게 하기 위해서.
참으로, 이처럼 베푸는 사랑은 모든 가치를 강탈해내는 도둑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이기심을 나는 건전하며 거룩한 것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유형의 이기심이 있다. 언제나 훔치려 덤벼드는, 너무나도 가난하여 굶주린, 병든 자의 병든 이기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이기심은 도둑의 눈을 하고는 광채를 내는 모든 것을 눈여겨 보며, 허기를 면할 욕심에서 누가 먹을거리를 넉넉히 갖고 있는지를 헤아려본다. 그러고는 베푸는 자의 식탁 주변을 늘 어슬렁거린다. 그같은 욕망에서 우리는 질병과 눈에 보이지 않는 퇴화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이기심의 도둑같은 탐욕은 신체가 병들어 있음을 말해준다. (중략)
퇴화는 베푸는 영혼이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우선 인간이 인식하고 의식할 수 있는 존재는 유일하게 나 자신, 즉 개인뿐이다. 직접적으로는 자기 자신만을 인식할 수 있으며 타인을 비롯한 다른 모든 사물, 환경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만 인지할 수 있다, 간접적으로라는 의미는 자신의 인식이 포함되었기에 '있는 그대로가 아닌' 상태로의 인식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그나마 가장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개체는 바로 자기 자신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누구와 친한지 등 소유와 지위에 관심이 많다. 특히 젊은 나이에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래야한다. 일단 먹고 사는 일부터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며 다양한 경험이 그들의 평생의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즉 물질적으로나 비물질적으로 '생존'을 위한 기본을 마련해야 할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 '먹고 사는 일'을 할 때 좀 더 나은 사람과 좀 더 편안한 일터에서 좀 더 나은 조건으로 일하고자 하는 것은 기본적인 '소유'의 욕구다. 그렇게 열심히 벌어서 자신의 삶을 하나씩 일궈나가는 것이 젊은 시절에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거나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해지고 현실에서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갈증을 느끼는 시점이 오면 '소유'보다는 '존재'에 관심을 두게 된다.
이렇게 전이가 일어나는 원인도 '소유', 즉 '생존'에 대한 갈급함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생존이 해결되면 순차적으로 존재에 대한 의문과 질문이 내 안에서 꿈틀댄다. 이제는 무엇을 하는지보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사회에서 나를 드러내야 하는지, 세상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내가 어떻게 쓰일지, 나의 삶은 행복으로 제대로 가고 있는지 등 '가치'와 '존재'에 대한 의문으로 자기 삶을 점검하는 기간을 지나게 되는 것이다.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자신의 내면은 자신의 '가치'에 집중, 심지어 집착까지 하는 시기가 온다.
이 때부터는 내가 아니라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자신의 행동거지도 살피게 되고 자신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숙고와 자기 점검, 나아가 자기 검열을 통한 '성찰'수순을 밟게 된다. 이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이렇게 자신을 더 바람직한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 자기 자신의 변화에 집중하는 시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자기 존재의 가치에 대해 묻고 답하고 괴롭지만 유익한 기간을 길게 가지기도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소유하며 만족코자 했던 자신을 넘어서서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세상에 유익한지를 자기 내면에, 하늘에, 거대한 누군가에게 묻게 되는 더 큰 시선을 쫒게 되는 것이다. 자기존재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자기를 갈고 닦는 배움의 시간으로 자발적인 고립을 선택하는 이도 있고 모든 것을 버리기 위해 애쓰며 세상과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는, 깊이 있는 삶의 태도를 자신에게 요구하기도 한다.
잠깐 나를 세워두는 자기의심.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들여다보는 자기부정.
나의 못난 모습을 직시하는 자기인식.
지금의 내가 버려야 할 것들을 찾는 자기검열.
이를 통해 깨부수어야 할 자기파괴.
파괴된 것을 없애버리는 자기살해.
치열했던 그 시간을 이겨낸 자기극복.
비워진 공간을 새롭게 채우자 다짐하는 자기배양.
배양된 씨앗에 싹을 틔우려는 지난한 과정의 자기정복.
모든 과정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나를 이끌 자기암시.
그리고,
드디어 허물을 벗고 깨끗해진 자기정화.
이렇게 자기 자신을 일정 기간 세워두고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고귀한 자아, 초월된 자아, 크나큰 자아, 내면의 자아와 만나는 시간은 결코 정체가 아니다. 나로써 다시 세상으로 솟구칠 깊은 숨을 고르는 시간이다. 형이상학에 빠져 계속 길을 돌아가는 듯하겠지만, 왠지 경쟁에서 뒤쳐지는 불안감도 가지겠지만, 이는 나는 단지.. 뒤로 물러서서 숨을 고르고 있는 것이며 그 시간 속에는.....무섭고 위협적인 것이 들어있을 것이다(주3). 이 시간은 자신이 아는 자신보다 더 크게 자신을 키워내어 '세상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세상의 질문에 지속적으로 답을 구하게 한다.
이러한 성찰적 질문에 모든 감각을 곧추세우고 이제는 자기 자신만을 향했던 시선이 타인과 세상으로 확장되고 증폭되면서 진정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매기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고 따르게 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사명', '소명'이 가슴 속에서 꿈틀대기 시작하면 비로소 우리는 '깨닫게' 된다.
'깨닫다'는 영어로 realize! 즉, real. 현실을 산다는 것이다.
의식으로 확장된 것에 행위를 입힌다는 것이다.
즉,
실천하는 자가 곧 깨닫는, 깨달은 자인 것이다.
이렇게
'나'라는 작은, 미약한 존재가
'세상의 쓰임'에 반드시 필요한,
우주의 조화를 위해 없어서는 안될,
하나의 점이라는 깨달은 사실을 위해
현실에서 자신이 해야 할 실천을 찾아서 해내는 자!
바로,
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자는 드물다.
이는 디오게네스(주3)의 일침으로 증명되는데 그는
'음악가가 리라의 현은 가락을 맞추는데 자신의 영혼의 상태는 부조화인 채로 있는 것.
수학자들(천문학자)이 태양이나 달에는 눈을 돌리는데 자신의 발밑에 있는 일은 지나쳐 버리거나,
변론가들이 정의에 대해서 논하는 데에는 매우 열성인데 이를 조금도 실행하지 않고 있다는 것,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돈을 헐뜯고 있는 주제에 이를 지나치게 선호하고 있는 것,
재산보다도 뛰어나다는 이유로 올바른 사람을 칭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크게 재산을 축적한 사람을 부러워하는 자들.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신들에게 희생을 바치면서 바로 그 희생식의 와중에 건강을 해칠 정도로 성찬을 드는 것'
을 자기단련의 부족이라 꼬집으며 자기 자신을 먼저 들여다보라 했다.
자기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어떤 의식 수준으로,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를 자각하지 못한 채 자신으로서 살지 않는 것이야말로 선하지 못한 것이다.
늘 깨달음을 갈구하고 의식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정직하게 열려있는 자신이 되고자 현실의 자신을 거부, 저항하며
더 큰 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
진심, 진리, 진실, 진짜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
진정성있는 자신으로 세상과 교우하며 자신의 목표가 더 이상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 자신에게 심겨진 씨앗임을 인지하는 지성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자,
이러한 자야말로
진정으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더 큰 세상을 사랑하는, 조화에 일익을 담당하는 자인 것이다.
==> 다음 주 토요일, 이기론의 CH3. '해체, 그리고 脈!'- 1. 이기는 이타다 2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주1>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릴케, 2003, 태동
주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2015, 책세상
주3>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 2001, 책세상
주4> 그리스철학자열전, 디오게네스. 2016, 동서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