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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카이로스의 사무실

by 어린길잡이
img.png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둘은 존재한다



햇빛이 슬며시 들어오며

아주 밝지만은 않은

한낮인 카이로스의 사무실

카이로스는 타자판을 두드린다


크로노스가 문을 똑똑 두드린다

중앙이 얇은 유리문을 연다

크로노스는 하늘색 셔츠에

통이 큰 회색 청바지를 입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날에 사무일이나 하고 있구나

카이로스라는 당자가 어찌 그리 시간을 보내는가

크로노스인 나도 남들처럼 소풍을 다녀왔는데 말이야


카이로스는 오른쪽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웃곤

묵묵부답하며 타자판을 두드린다


크로노스는 한참을 지켜보다가 말한다

답답한 녀석, 컴퓨터와 결혼이나 해라

나는 소풍 갔다가 남들과 달리

호화로운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 거야

크로노스가 열고 나간 유리문은

진자 운동처럼 움직이며 부채질한다


카이로스는 잠시 일어나 문에 손을 댄다

쓰다듬어지는 강아지처럼 그제야 가만히 있는다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아 이번에는 휴대폰을 켠다

컴퓨터와 휴대폰을 번갈아 가며 골똘히 바라본다


컴퓨터로는 시 한 편을 쓰고 있었고

휴대폰으론 시 한 편을 읽고 있었다


회색 후드 티를 둘러쓰고

검정색 추리닝을 입었어도

카이로스는 행복하다

크로노스의 삶을 존중하면서도

카이로스의 몰입, 몰입의 카이로스

찰나의 그 순간을 위하여




크로노스는 절대적인 시간으로서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고, 모두의 삶 속에서 똑같이 흐른다. 출근길과 통학길에 오르고, 해외 여행을 가기 위해 장시간 비행기를 타야 하는 것처럼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서 쓰이는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상대적인 시간으로서 모두에게 달리 주어지고, 모두의 삶 속에서 각기 다르게 흐른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온전히 몰입할 때, 사랑하는 사람과 평범한 밥을 먹을 때, 우리의 시간은 야속하게 서둘러 지나간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크로노스인 시간이 누군가에겐 카이로스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일이 즐겁고 학교가 즐거운 공간일 때, 비행기에 타는 것조차 설레고 두근거리는 일일 때, 그 시간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누군가에겐 카이로스인 시간이 누군가에겐 크로노스일지도 모른다. 한가로이 바닷가에 앉아 먼 수평선을 구경하는 일이 누군가에겐 시간을 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나와는 대화가 잘되고 쿵짝이 잘 맞는 사람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먼 산을 바라보며 대화가 어서 끝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여러분들에겐 카이로스는 무엇인가. 또 크로노스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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