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은 관계의 종류 중 하나이다. 갈등의 존재 조건은 두 존재가 있어야 하고, 그 두 존재가 하나의 쟁점을 두고 다른 의견과 입장을 갖고 있으며, 둘 사이에 이에 대한 물리적 및 비물리적 다툼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인류사는 갈등의 역사로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개인이나 부족 간의 갈등, 더 나아가 국가 간의 갈등은 우리 곁에 항상 존재해 왔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학창 시절에 누구나 한 번쯤은 친구와 의견 충돌을 비롯한 갈등을 겪은 적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란 자고로 누군가와 갈등을 겪고 이를 풀어내며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도 갈등은 만연한 것 같다. 전 세계적으로 전쟁, 정치, 이념 등 다양한 주제로 사람들은 갈등을 겪고 있다. 한국 사회도 이와 비슷하듯 많은 갈등을 겪고 있다. 다만, 세계에 존재하는 갈등을 마냥 부정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갈등은 조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적인 단계이다. 갈등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문제는 갈등을 표출하는 방식과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 사회는 갈등을 효과적으로 대처해왔는가. 또한 한국의 개인은 갈등을 대처하는 방법을 잘 배웠는가. 이번 글에서는 단순히 갈등 자체에 초점을 두기 보다는 갈등을 대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춰보려고 한다.
밑의 글은 작년에 내가 쓴 칼럼이다.
<한국 젊은이들의 집단 착각, 남녀갈등이라는 허상>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사회에 남녀차별과 남녀갈등을 주제로 하는 담론이 많이 생겼다. 뉴스, SNS, 유튜브 등의 다양한 매체에는 지금도 차별 해소와 역차별 해소 정책, 자신이 겪었고 겪고 있는 성차별 등 ‘남녀’라는 키워드를 골자로 하는 콘텐츠가 간간이 보인다. 그리고 간혹 일부 컨텐츠와 그곳에 달린 댓글은 이성을 분노 섞인 목소리로 욕하고 조롱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보면, 한국 사회에서 남녀갈등은 심각한 문제로 보인다. 더군다나 20대 초반의 젊은 인구의 연애비율은 25%밖에 되지 않고, 세계 최저 출산율을 기록하는 한국의 상황에서 이러한 남녀갈등은 뼈아픈 사회적 문제이다.
2년 전인 2021년에는 다소 충격적인 글로벌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글로벌 여론 조사 기관인 IPSOS 글로벌 28개국 2만 3천명을 대상으로 한 ‘갈등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설문에서, 갈등 개별 12개 항목 중 무려 7개의 분야에서 한국이 1등을 차지했다. 그리고 1등을 기록한 갈등의 분야에는 남녀갈등도 있었다. 하지만 이 결과는 그 나라의 갈등을 객관적으로 분석한 조사가 아닌, 그 나라 사람에게 갈등이 얼마나 심각하다고 느끼는지를 물어 얻은 것이었다. 즉, 한국에서 남녀갈등이 심각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이 자국에서 남녀갈등이 심각하다고 느끼는 것이 이 조사의 결과였다. 갈등의 존재와 갈등의 인식은 전혀 다른 점에서, 문득 ‘우리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 남녀갈등에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농담 같은 의문이 내게 들었다.
한국리서치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 따르면, ‘한국 사회 남녀갈등 심각한가’라는 질문에 20대와 30대는 각각 79%, 80%로 그렇다고 답변했다. 반면, 40대와 50대는 각각 75%, 62%, 60대 이상은 56%로 그렇다고 답변했다. ‘남녀 갈등 해결 시급하다’라는 질문에는 20대와 30대는 각각 71%,, 44%로 그렇다고 답변했지만, 40대는 21%, 50대는 18%, 60대 이상은 9%의 비율로 그렇다고 답변했다. 이 2가지 결과는 주로 한국의 청년들이 남녀갈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남녀갈등을 느끼는 남녀갈등을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서울신학대학보사에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성별갈등이 주로 어디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익명 커뮤니티, SNS, 뉴스와 댓글기사의 순서로 답변이 가장 많았다. 즉, 청년들이 심각하다고 느끼는 남녀갈등은 인터넷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난 이러한 사실에서 커뮤니티와 SNS와 같은 인터넷이 청년들이 남녀갈등을 느끼도록 부추긴다는 주장을 하고 싶다.
유튜브의 ‘숏츠’ 영상이나 인스타그램의 ‘릴스’를 보다 보면, 사연자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글로 쓴 것을 AI 내레이션으로 들려주는 컨텐츠가 가끔 화면에 뜬다. 다양한 내용의 사연이 있지만, 남녀를 주제로 하는 사연이 문제시된다. 사연은 대부분 한 쪽 성별이 잘못된 행동을 해 이를 조롱하는 뉘앙스로 비판하는 식의 내용이다. 컨텐츠가 남녀의 차이와 차별을 부각시켜 갈등을 조장하는 수준인만큼, 댓글들도 폭력적이고 이성을 비웃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는 SNS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셜 커뮤니티 내에서 만연한 컨텐츠이다. 남녀를 가르고 조롱하는 내용 자체도 문제이지만, 사실 확인이 안되고 컨텐츠가 사용자에게 자주 노출되는 점은 더 큰 문제이다. 그 이유를 말하기 위해 토드 로즈의 <집단 착각>을 이용해보겠다.
그는 사람이 무언가를 자주 보면, 그것의 진위여부와 관계없이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침묵하는 공간 속에서 소수가 특정 의견을 표할 때, 다른 이들의 침묵을 그 의견에 동의하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어쩌면 사람들이 사실이 아닌 남녀갈등 컨텐츠를 자주 보며 이를 사실로 믿고, 자극적인 댓글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폭력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고 착각하는 비극이 우리 사회에 펼쳐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의 책에 따르면, 미국의 한 SNS 분석연구기관에서 트위터에 작성된 80만개의 댓글 중 90%가 10%의 계정에서 작성되었고, 10% 중 일부는 AI계정과 가계정으로 의심된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한국의 젊은 남녀는 존재하지 않는 사실과 생각에 존재하지 않는 갈등이란 안개를 만들었고, 스스로 그 안개에 갇혀 허우적대며 서로를 미워하고 두려워한 것은 아닐까?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한국의 능력주의 사회에서 완벽주의의 정도가 심화되는 한편, 경제적인 불확실성은 커져 청년들이 불안을 안게 된다고 말했다. 독일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인간은 불안에 대해 두 가지 방식으로 대응한다. 사랑과 연대를 통해 불안감을 극복하고 안정감을 확보하는 방식과 자유를 던져버리고 새로운 의존과 복종을 추구하는 방식 두 가지다.”라고 말했다. 경제적으로 불확실하지만 자신에 대한 기대는 높아져 불안한 한국의 청년들은 내면의 불안에 대응하기 위해 남녀 갈등을 가십거리로 소비하는 것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국에 남녀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한국 사회에는 성차별 문제를 비롯한 남녀 갈등은 존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사회적 노력이 더욱 필요한 상황이다. 하지만 우리는 존재하는 남녀갈등 뿐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남녀갈등을 느끼고 있다. 검증이 되지 않은 남녀갈등 콘텐츠에 가십거리로 소비하고, 현실에서는 남녀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을 재미로 여기는 청년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경고하고 싶다. 또한 이를 보며 한국이 심각한 남녀갈등을 겪고 있다고 느끼는 청년들에게 사실이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다. 가십거리 소비에 의존하고 갈등이 존재한다고 착각하며 허상에 복종하는 것을 이제는 멈춰야 한다. 알지 못하는 서로를 조롱하고 욕하기보다, 잘 알기 위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남녀 갈등을 조장하는 컨텐츠를 만드는 이를 처벌하는 규제와 남녀 갈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해당 칼럼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갈등을 과장되게 인식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논리적 오류는 바로 일반화이다. 위의 칼럼에서 언급한 <집단 착각>의 유형도 상당수가 일반화와 관련 있다. 몇 가지의 자극적인 사례를 보고, 심지어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이야기에 사람들은 간혹 넘어간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그러한 갈등이 있다고 인식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곤 한다. 이와 같은 일반화의 오류는 불필요한 개인적 불안을 야기해, 결과적으로 사회적 동요를 야기할 위험을 갖고 있다. 사회적 동요 속에 빠진 사람은 갈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갈등과 갈등의 당사자들을 이해하기 보다는 욕하고 비난하기 바빠지게 된다. 우리가 갈등을 과잉인식하는지 검검하는 것은 어렵고 때로는 귀찮을 일이 될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분명히 필요한 일이다.
2. 갈등을 해결하는 데 관심을 두기 보다, 이를 분노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붓는 가십거리로 소비하는 건 아닌가
이 질문을 보자니, 내면에서부터 부끄러움과 자책감이 스며 나온다. 갈등이 발생하면 나도 모르게 타인을 몰상식한 인간으로 전제하고 갈등에 접근했다. 항상 상대방이 잘못했고, 나는 그걸 이해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항상 자리했다. 어쩌면 우월의식과 비슷한 오만함이 내게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오만함을 바탕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데 초점을 두기는 커녕 감정적으로 상대방에게 일갈하곤 했다. 그러고 나서 주변 지인에게 그 사람을 욕하며 기분을 풀어내는 것은 내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남을 욕하고 분노하는 것은 사실 내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기분이 풀리지 모르지만, 감정의 격앙이 가고 나면 내 마음 속에는 알 수 없는 허무함과 자책감이 자리 잡는다. 즉, 마음이 그다지 편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또한 갈등을 해결하는 것에서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당사자 사이에 부정적인 말과 감정이 오가, 갈등은 해결하기 어려운 다툼으로 번진다. 여유가 있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굳이 싸우려 들지 않는다. 되려 차분히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해결 자체에 이성적으로 접근한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갈등, 그리고 개인적은 갈등의 원인 중 하나는 나 자신한테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물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내면을 강화시키는 것은 분명히 갈등을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한다.
3. 우리 사회의 갈등은 이해의 노력이 포함된 갈등인가, 아니면 단순히 혐오만이 존재하는 갈등인가
이 부분은 참 정리해서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개인이 모든 갈등을 알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우리의 갈등에 혐오가 어느 정도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는 어렵지만, 특정 계층과 세력을 나타내는 표현 중에 인격적 모독이 포함된 표현이 정말 많다. 표현만 단순히 봐도 해당 갈등에 혐오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갈등에는 이성적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입장 말하기 바쁘고, 남의 이야기는 귀 닫아 듣는 태도는 내 입장을 설득시키기도 어려우니 말이다.
위에서 말한 나의 견해는 다소 추상적인 면이 있다. 이성적 대화라는 게 말이 쉽지,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미운 놈 떡하나 더 주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이성적 대화는 반드시 갈등을 해결하는 묘책은 아닐지라도,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양 쪽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이며 효과적인 수단임은 확실하다. 개인적 갈등만 바라봐도 용기 내어 상대방과 이야기했더라면, 해결될 갈등이 여러 있을 것이다. 대화하자고 손을 내미는 용기, 가십거리로 소비하지 않고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 그저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노력이 나를 포함한 개인과 사회에 필요하다. 지나간 것은 미련없이 보내버리고, 현재 마주하고 있는 갈등과 미래에 마주할 갈등은 이성적 대화로 접근해보는 것은 참 현명하면서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우리 마음 속에는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원하고 우리 자신보다 모든 것을 더 잘해내는 누군가가 살고 있어" - 데미안 -
자신의 내면 속 진정한 자아를 찾고, 그 진정한 자아를 믿어보는 길을 모두가 걷기를 바라며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