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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수녀님

by 어린길잡이


fcf04cd2-56fc-41e9-9504-025961c794c2.png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싶었습니다



지하철 맨끝 구석자리에 앉은 수녀 한 분


고개를 수굿하시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도


처마 밑 수줍게 피어난 고드름이 흘리는 눈물처럼


지나친 것들에 절절히 스며봤을까



전철을 놓칠까 노심초사하느라


에스컬레이터마저 급히 올라가봤을까



저 맑은 눈망울 속에도


요동치는 밤바다의 물결이 있었다


신앙도 어찌할 수 없는 썰물과 밀물



야트막한 둔덕을 타고 흐르는 물길을 들킬까


눈을 지그시 감는다


어두운 벽 너머에 강림한 신보다


때로는 벽 안에 안주하는 인간이 좋았다



수녀님이 일어나시니


기다란 열차 안, 거친 파도가 철썩거렸고


일렁이는 수면 아래로 나는 잠긴다



직육면체 세계를 두드리는 신실한 파동이 무서웠다





의도치 않은 생각의 물결이 제 뺨을 때립니다. 즐거운 공상도 때로는 아픕니다. 마치 귀에 물이 들어가 불편해지는 느낌, 또는 코에 물이 들어가 눈 사이 쪽 코가 아린 느낌입니다. 지하철에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며 목적지에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하철이 잠시 정차하고, 철문이 열리며 수녀님 한 분이 들어오셨습니다. 스님을 뵈는 일처럼 수녀님을 뵈는 일은 흔치 않아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습니다. 물론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은 무례한 일임을 잘 알아서 이따금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수녀님은 암흑 뿐인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셨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계속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다 저와 눈이 마주쳤고, 전 제 시선을 들킬까 두려워 곧바로 고개를 숙였습니다. 일분이 조금 지났을 무렵, 다시 고개를 들어 수녀님을 응시했습니다. 그녀는 스마트폰을 두드리고 계셨습니다.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기도 했고, 혹은 일상을 기록하는 듯 했습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보니, 문득 그녀도 세속적인 면이 분명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녀님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지만, 상상 속 수녀님의 모습과는 조금은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도 지나간 것에 사무쳐봤을까, 시간에 쫓겨 에스컬레이터를 급히 오른 적도 있을까. 별의별 공상에 잠기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습니다. 어느 역에서 지하철은 정차했고, 수녀님은 다소곳하게 모았던 무릎을 피시며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다른 행인들처럼 살짝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을 나섰습니다. 나풀거리는 회색빛 수도복이 새하얗지도 새까맣지도 않은 것은 신앙과 본능이 한데 뒤섞여 있는 수녀님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머리에서 일어나는 심심함을 풀고자 수녀님을 이용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부끄러워졌습니다. 요동치는 생각의 물결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수녀님이 일어나시며 생긴 파도가 저를 덮쳤고, 저는 수면을 부유하기를 포기하고 밑으로 가라 앉았습니다. 물 아래는 소름이 돋을 만큼 고요했습니다. 아무 일도 모르는 아이처럼.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 잘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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