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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시는 커야만 했다

by 어린길잡이





시인의 시가 길어져 감은

부서지지 않으려는 의지다


이음새는 어색한 연대가 아닌

교각이 무너지는 것을 한사코 막고자 함이다


음절이 어절이 되고

어절이 행이 되고

행이 문단이 되며

문단이 한 편의 시가 되어도

시는 짧지만


씹는 것은 잘게 쪼개는 것

요약은 앗아간다는 것

짤막함에 깃든 강렬함을 추종하는 사람들


세상이 스스로 토막 나기를 바랄 때,


사랑은 길다고

시는 말해 왔다


잊을 수 없는 순간은

잊었던 순간들로 빚은 행복


일식과 월식을 노래하던 시가 길어져야

해달별은 제 자리를 찾아 떠나고

어스름에 갇혔던 눈망울들은

아스라이 빛나는 반딧불이의 꼬리를 발견하지





시란 무엇일까, 고민하는 나날이었습니다. 시의 본질은 세상과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또한 시는 함축적이어야만 합니다. 형태는 변할지언정 시는 집약적입니다. 그러나 문학동네 신인상 시를 비롯해 2024년 신춘문예에서 수상을 받은 시들은 일반인들에겐 시처럼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그 길이가 깁니다. 길 뿐만 아니라 문장으로 이뤄진 경우가 많고, 산문을 떼어 온 것처럼 행과 행이 아닌 하냐의 문단이 발견되기도 하죠. 모든 시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현재 시는 길어지는 경향성을 지닌 것 같습니다.



산문시는 존재해 왔습니다. <관동별곡>처럼 긴 시도 존재했죠. 하지만 당대 문학 사조가 긴 시를 추구하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무엇이 시를 길어지게 하였을까. 그것은 세상을 노래하는 시가 때로는 세상에 저항하기도 하는 시의 이중성에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글은 점점 짧아지고 있습니다. 행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넓어지고 있으며, 대중들은 이전보다 짧은 글을 읽는 것에 익숙합니다. 이것은 비단 글에서만 발생하는 일이 아닙니다. 정보를 습득하는 모든 플랫폼에서 발생하는 현상이죠. SNS는 이용자로 하여금 숏츠나 릴스처럼 숏폼의 영상 콘첸트를 보도록 만듭니다.



모든 현상은 양면적입니다. 좋은 면과 나쁜 면이 공존합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효율적으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단순 인터넷 검색을 넘어, 인공지능 산업의 놀라운 발전은 정보를 찾는 데 들이는 인간의 수고를 획기적으로 덜어주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개인적.사회적 비용이 절감되어 우리의 삶은 편리해졌습니다. 반면에 사람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무언가를 수행하는 데 긴 시간을 할애하기를 싫어하기 시작했습니다. 재밌는 영상을 파악하는 데는 단 몇 초의 시간을 투자하고, 기사가 잘 읽히지 않으면 되돌아가기 버튼을 눌러 다른 글을 찾습니다.



문제는 현상은 가만히 있지 않고 서로 상호작용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조차 긴 시간을 투자하기를 거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별자리, 혈액형, MBTI 등 사람을 효율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문화는 과거부터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사람들은 일상생활 대부분에서 순식간에 대상의 가치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복합적인 존재를 단편적으로 이해할 우를 범할 공산이 큰 것입니다. 복합적인 것을 다루는 일에 익숙한 사람의 직관과 단편적으로 대상을 파악하는 사람의 직관은 그 질이 다릅니다. 전자는 이면을 생각하려는 성질을 갖고, 후자는 판단을 재빨리 완결시키려는 성질을 갖기 때문입니다.



과한 추측일 수 있지만, 어쩌면 지금의 시는 이러한 세류에 저항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믈 이해하는 일은 짧지도 쉽지도 않다. 오히려 지겹도록 길고 이해하려는 자로 하여금 스트레스를 준다. 그렇지만 사랑과 이해로 인류는 나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짧은 것의 대표인 '시'가 자신부터 짧은 것에서 벗어나는 솔선수범함을 보여야 한다. 이가 현 문인들의 진실된 바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래 이 시의 제목은 <짧은 것은 끝내 길어져야만 한다>, <짧은 것의 반항>으로 지으려 했습니다. 그러다 시의 성장을 나타내고자 <시는 커야만 했다> 라고 지어봤습니다.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다. (...)


그러나 선한 인간은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옳은 길을 잊지 않는다.”




<파우스트> -괴테-






방황의 구렁텅이로 끊임없이 빠지고야 마는 나약한 인간인 저는 흙벽에 튀어나온 돌뿌리를 잡고 힘겹게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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