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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호 Aug 18. 2024

백두대간 길은 어느 한 곳도 만만한 곳이 없다

오전 7시 25분, 충북 괴산군 연풍면 해발 548미터의 이화령에 도착했다. 이른 시각이었지만, 더운 기운이 몸에 스며들었다. 오늘 낮 최고기온은 29도라고 예보했다. 조령산으로 오르는 길은 급하지 않았다. 30여 분 올랐을까, 주 능선으로 들어서면서 9부 능선이 이어졌다. 땀이 몸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헉헉대며 오르니 조령 샘물이 졸졸 흘렀다. 샘물은 차갑고 맛이 좋았다.     

바로 이어지는 전나무 숲에는 그늘이 가득했다. 바람은 없었지만, 이화령과는 달리 시원했다. 참나무 수림지대가 나왔고, 붉은 표피의 홍송이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30여 분 오르니 드디어 해발 1,017미터의 조령산 정상이 나타났다.     

정상에서 우측 길은 1관문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나는 좌측 백두대간 길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에서 신선암봉 등 여러 봉우리를 오르내리면서 4.55킬로미터를 걸으면 3관문이 나온다. 그러고는 다시 마패봉에 오르고 부봉삼거리와 동암문, 평천재를 거쳐 하늘재로 내려서려 한다.     

오늘 산행은 8시간으로 잡았지만, 직장 사정으로 일주일 전에 홀로 이곳을 산행했었던 산악 대장은 11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산악 대장보다 체력이 떨어지는 나에게는 벅찬 산행이다. 그러나 미리 겁내지 말자고 다리를 토닥거려 본다.     

북쪽 아득한 곳에 월악산 영봉이 위용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동쪽에는 문경의 진산 주흘산이 수채화처럼 서 있었고, 산 밑에는 왕건 드라마 세트장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하늘이 맑다. 햇빛이 쏟아져 내려 연녹색 나뭇잎을 짙게 만들고 있었다. 여름의 산은 청년 같다. 지난 5월 소백산 구간을 산행했을 때는 등산화에 눈과 흙을 흠뻑 뒤집어썼었는데,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자연의 생명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바위가 많은 산에는 산행하는 사람들의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밧줄이 곳곳에 매여져 있었다. 초여름의 밧줄은 햇빛을 받아들이는 초록 나뭇잎처럼 팽팽했다. 바위 지대는 위험스럽기는 해도 긴장에서 느낄 수 있는 전율이 있다. 칼날 능선과 바위 밑 절벽은 아찔했다.     

전율을 느끼며 한 발 한 발 내디뎌 올라간 곳에 괴산의 명산이라는 신선암봉(神仙巖峰)이 주로를 조금 벗어난 곳에 앉아 있었다. 자칫 앞산의 자태에 넋을 잃었으면 모르고 지나쳐 버렸을 것이다. 신선암봉은 신선이 살던 곳인가? 그렇다면 신선이 되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천상병의 <귀천>을 읊조렸다.      

친구들이 세상을 뜨고 있다. 함께 근무했던 연배들도 갑자기 저세상으로 갔다. 이미 죽음을 예고한 이들도 있었지만, 사랑하는 가족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가버린 이들도 있다. 나이가 있고 하니 비상계획으로 유언장을 남겨두라고 멘토인 산이 나에게 조언해 준다.     

유언장은 ‘죽음에 이르러서 부탁하여 남기는 말’이라고 사전에서는 풀이하고 있다. 나이로는 아직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삶이 고되고 험악해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낯설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어떤 내용으로 나의 유언장을 남겨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주위를 보면서 내 몸도 예전보다 나이를 먹었으니,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진리에 순응해야겠다.     

지난 3월 26일 백령도 앞바다에서 마흔여섯 명의 젊은 생명이 가족에게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여러 의문을 남긴 채 천안함 사건은 북한 소행으로 발표된 후 사회 전반이 어수선하다. 전쟁 불사론이 나오더니 급기야 전쟁을 자극하는 말이 나오고 전쟁이 두렵지 않다는 사람들도 있다. 정신을 굳게 가지자는 결연 의미로 받아들일 수는 있다. 그러나 전쟁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가 있다. 전쟁 불사론이나 전쟁이 두렵지 않다는 말은 상대를 자극한다.     

이미 여러 채널을 통해 알고 있었던 이야기지만, 태극기를 배경으로 군인들이 영정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번에 갑자기 순직한 천안함 희생자들의 영정사진을 준비하다 보니 그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란다. 전방 장병들의 정신 무장을 강화하기 위해 젊은 병사들에게 유언장을 쓰게 했다고 한다.     

나는 언젠가는 저세상으로 간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내 가족들을 위해 유언장을 미리 써놓으려고 한다. 내 가족은 내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아들은 아직 영정사진을 찍고 유언장을 쓸 나이는 아니다. 세상의 험악한 말들을 가려듣고 견디기에는 아직 버거운 나이이다.     

아들이 군에 입대한 가족들은 늘 불안하다. 영정사진과 유언장이 필요할 수는 있지만, 지금 전쟁 불사론이 나오고 추측의 전쟁 시나리오가 떠돌아다니는 상황에서 그런 준비를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전쟁은 비극이다. 핵무기로 무장한 현대전은 공멸을 초래할 수 있다. 내일은 55번째 현충일이다. 호국선열의 넋을 생각하며, 전쟁의 참혹함을 다시금 떠올린다.     

11시가 지나자, 시장기가 몰려왔다. 나무 사이로 볕이 드는 자리가 눈에 띄었다. 바위에 앉아 김치와 풋고추, 그리고 새벽에 아내가 조리한 고기볶음을 꺼내놓았다. 산행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점심시간이다. 양말을 벗고 등산화 속에 발을 숨 쉬게 하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시간이 여유롭다.     

배부른 몸이 뒤뚱거리며 오르막에서 신음을 내는가 싶더니 조령 3관문으로 내려섰다.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에 있는 조령에 축성된 조령산성의 관문이다. 동쪽과 서쪽이 화강암 절벽이라 천연 요새다. 신라와 고구려도 이곳에서 영토 전쟁을 했고 고려 때도 그랬다고 한다.     

조령 3관문의 숲속 휴게소에서 잠시 쉬던 발을 채근하려는 듯이 마패봉으로 오르는 길은 가팔랐다. 헉헉대며 오른 곳에 마패봉이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며 제3 관문 옆 조령 약수에서 보충한 식수를 들이켰다. 물은 조령 샘 맛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밋밋했다. 작게 보였던 월악산이 언제부터였는지 커져 있었다. 그렇다. 이곳은 월악산국립공원이었다.     

바람 한 점 없다. 그래도 전나무와 참나무, 그리고 홍송들이 만들어 놓은 그늘에 의지하여 봉우리를 넘고 또 넘었다. 오전보다는 거리가 줄었지만, 아직도 밧줄을 잡고 바위를 타야 했다. 여름용 장갑을 낀 손바닥은 밧줄에 부르터졌다. 이번에는 철 계단을 한없이 오르다가 휙 불어오는 바람에 시원함을 느끼며 잠시 휴식을 취해본다.     

하늘재로 내려가는 철 계단이 있는 곳에 부봉삼거리가 있었다. 선두는 오후 1시 20분경에 하늘재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남녀 여섯 명이 내 뒤에 있다. 후미가 아니라서 느긋하다. 봉우리 하나를 오르면 다시 봉우리가 나왔다. 지난해 11월 탔던 신의터재에서 갈령삼거리까지의 산행길과 비슷하다. 평천재와 탄항산 그리고 모래산을 오르내렸다.     

오늘 산행 거리가 18.36킬로미터이었으나 바위가 많고 여러 봉우리를 오르내렸기 때문에 힘들었다. 백두대간은 어느 한 곳도 만만한 곳이 없다. 남진(南進)하던 여성이 백두대간 길에서 사람을 만나니 반갑다고 말을 건넸다. 백두대간 길은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늘재에서는 음식을 조리할 수 없어 8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가야 하는데, 먼저 내려온 사람들이 아직 내려오지 않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점심을 굶고 내달린 선두들이 후미 일행에게 어디쯤 오느냐고 묻는 무전기 소리가 삑삑거렸다. 2킬로미터 남았다는 우리도 미안했다. 그렇지만 우리도 부지런히 걷고 있으니, 피차 미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다리와 능력이 제각각 달라 훨씬 먼저 산에서 내려온 선두들은 항상 여유가 있다. 그런데 오늘은 3시간 먼저 내려온 선두나 우리나 처지가 같다. 하늘재까지는 능선도 있고 가끔 언덕을 가볍게 오르내리는 구간이다. 드디어 멀게만 보였던 산이 가까워지고 기슭이 커져 보였다. 초여름 날씨에 9시간 동안 머무른 산은 눈이 시리도록 초록빛 옷을 입고 있었다.      

하늘재에 도착하니 몸은 지쳤지만, 산행의 성취감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사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마무리하며, 내일의 현충일을 맞아 다시금 평화와 안녕을 기원해 본다. (18차, 이화령 - 조령산 - 하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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