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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이오 Oct 15. 2022

EP4. 나를 따르라, 나 좀 따라주겠니

EP4. 나를 따르라, 나 좀 따라주겠니EP4. 나를 따르라, 나 좀 따라주겠니

[EP4. 나를 따르라나 좀 따라주겠니]     


 전승의 시작육군 보병학교~”     


 바라지 않던 입대하는 날 아침이 찾아왔다.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감정이 교차했다. ROTC를 하며 방학마다 훈련소로 입교하던 날과도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ROTC를 선택하며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은, 용사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출타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내가 임관하여 보병학교로 가는 시점에는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사라진 셈이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주말 외출과 외박이 통제될 가능성이 높은 상태에서 입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날 아침의 기분은 굉장히 오묘했다. 전날 밤까지 필요한 준비물들과 피복류를 모두 의류대에 싸서 준비해두고, 아무도 없는 교회에서 잠시 혼자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들기 싫은 잠을 억지로 청해서 들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부모님과 함께 학교로 이동하며 창  밖으로 비추는 평범하고 익숙한 도시의 풍경이 그날따라 유독 인상 깊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통제 완화가 되어 출타의 가능성을 단 하나의 희망으로 품고 마음을 진정시키며 학교로 향했다.     


 마침내 학군단에서 준비해준 통합수송 차량에 탑승했다. 행선지는 전라남도 장성. 

장성에는 내가 가게 될 보병학교를 포함하여, 포병, 기갑, 화생방, 공병 등 여러 병과학교와 전투근무지원단 등이 속해있는 ‘상무대’가 있었다. 공보정훈 병과가 되었다면, ‘캠퍼스’라고 불리는 대전의 자운대행 버스를 탔겠지만, 예상치 못하게 보병이 되어 전남 장성으로 가는 상무대행 버스를 타니 그제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EP2. 나는 왜 보병이 되었는가 참고)     


 전라도로 가는 풍경은 비교적 익숙해서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친가 쪽 시골이 전라남도 영광과 함평이어서 그 일대에 있는 장성으로 이동하는 창 밖 풍경이 낯설지는 않았다. 마침내 상무대의 위병소를 통과해서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다.     


 안녕연락해

 보딱이들 잘 가라~”     


 제일 먼저 공병 동기들이 내렸다. 그리고 화생방 동기들, 그리고 포병 동기들, 보병이 마지막이었다. 병과 중 가장 많은 수가 중 배치된 보병은 육군사관학교 출신들과 제3사관학교 출신들, 나와 같이 학군단 출신들을 모두 모아 3,000명 가량이었다. 보병으로 분류된 내게 유일한 위안이 된 요소였다. 그렇게 보병 동기들과 함께 보병 막사 앞에 내려서 줄을 섰다. 코로나19로 인해서 막사로 들어가는 대기 시간이 길었다.     


 입교 후 첫 2주는 ‘격리’였다. 임관 직후 출타 없이 입교 한 육사와 삼사 동기들은 아예 다른 막사에서 격리를 했다. 학군단 출신들은 임관 후 출타도 있었고, 전국 각지에 분포된 대학을 갓 졸업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철저히 분리해서 격리하도록 통제 되었다. 나로서는 그래도 다행이었다. 같은 학교 학군단 출신의 보병 동기들과 같은 생활관을 쓰면서 꽤나 즐겁고 여유롭게 생활했다. 가져간 책들도 많이 읽고, 넷플릭스도 결제해서 보기 시작했다. 동기들과 이런저런 시덥잖은 농담을 하며 웃고 떠들며 지내서 좋았다.      


 격리하던 중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격리를 하면서 매 끼니를 도시락을 먹게 되었다. 도시락은 영내에 있을 때 추진 보급된 것이 아니라, 매 끼니마다 금액을 지불하며 업체를 통해 배달을 받아서 추진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통보를 받게 되었고, 지원받는 금액도 공지가 될 때마다 달라졌다. 나는 갓 임관해서 월급을 받으며 예산 사용과 관련된 경제적 관심이 많은 상태에서, 타 병과들보다 유독 많은 금액을 지불하며 만족스럽지 못한 식사를 하게 되고, 그것에 대해 의견을 구하거나 정확하게 통제받지 못하는 상황이 불만스러웠다. 내 주변의 대부분의 동기들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그래서 ROTC 59기 총동창회 BAND를 통해 글을 남겼다. 현 상황에 대한 불만과 그에 대한 답변요구를 총동창회 임원단에게 전달했다.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못했지만, 구성원들의 불만사항을 전달하고 그를 통해 소통의 과정이 일부 진행되었다는 점에서는 만족스러웠다. 모두를 위해 고생하는 임원단들의 수고를 알지만,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 더욱 건강하고 자유로운 소통이라고 생각했다. 이 자리를 빌어 당시에 수고해준 임원단 동기들에게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당시 게시했던 BAND 글 캡처

 그렇게 꽤나 이슈가 된 격리 생활이 끝나고, 드디어 대대별로 분류가 되었다. 분류는 각자 배치받는 자대의 지역과 임무를 기준으로 분류되었다. 전방, 후방, 특전 등 부대 특성에 따라 분류된 것이다. 나는 50사단으로 분류 받은 상황이었기에 지역방위사단에 해당하는 대대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2층 침대 두 개와 각자 책상 하나씩을 사용하게 된 4인실, 8평 남짓의 생활관에 처음 보는 동기 세 명과 함께 ‘50생활관’에 배치되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조금 어색했지만, 대화를 나누며 금방 친해졌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학군 동기들 대부분 친화력이 뛰어나고, 활발한 성격인 것 같다. 그래서 대화도 금방 잘 통했고, 무엇보다 즐거웠다. 나는 그 때 앞서 말 한 ‘도시락 이슈’와 관련해서 다른 학교 동기들로부터 ‘도시락 열사’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생활관의 이슈는 무엇보다 어느 지역으로 배치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었다. 책임지역이 가장 넓은 50사단(대구ㆍ경북 전 지역)에서 단연 가장 바라던 곳은 대구였다. 우리 네 명은 ‘아마 생활관 단위로 같은 지역으로 배치됐을 가능성이 높다.’라는 예측을 하며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50생활관 백00, 25, 00, XX 대구     


  우리는 생활관에 돌아와 기쁜 마음을 만끽했다. 같은 사단이지만 다른 지역(주로 해안)으로 배치 받은 양 옆의 다른 생활관 동기들의 눈치를 보며 숨죽여 기뻐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교육훈련이 시작됐다. 나와 같은 50사단으로 배치 받은 동기들과, 31사단으로 배치 받은 동기들이 ‘4학급’으로 함께 교육훈련을 받았다.     

 

유격훈련 당시 50생활관 동기들과 찍은 사진

 같이 훈련을 받고 생활하며 동기들과 정말 친해졌다. 입교하며 유일한 희망이었던 외출과 외박에 대한 기대감은 점점 사라졌고, 결국 4개월의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위병소 밖을 나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봤을 때 ‘오히려’ 좋았다.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안에 있는 동기들과 정말 끈끈하게 친해졌다고 생각한다. 함께 체력단련도 하고, 맛있는 음식들도 먹고, 생활관을 옮겨 다니며 모여서 밤새 떠들기도 했다. 자대 배치를 받아 곳곳으로 흩어진 지금도 서로 연락하며 지내는 것이 군 복무의 큰 힘이다. 돌이켜봤을 때, 4개월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관계 맺은 동기들과 평생을 함께하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한다.     


 동기들의 유형은 다양했다. 그래서 더욱 재밌었던 것 같다. 대체로 육사 동기들을 보면서는 진짜 똑똑하고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보병학교의 슬로건은 “나를 따르라!”인데, 육사 동기들을 보면서는 “나를 따르라!”라는 말에 따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또, 대체로 삼사 동기들을 보면서는 진짜 각잡히고 패기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따르라!”라는 목소리에 우선 위압감이 있을 것 같았고, “나를 따라!!”라고 강한 어조로 말해도 그 권위가 살아 있어서 따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를 생각해봤을 때(학군 동기들이 아니라 오롯이 나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나를 따르라!”라는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목소리 톤도 패기가 넘치거나 근엄하지 못했고, 나를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에는 체력적으로나 군사지식으로나 뛰어나지 못해서 권위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 좀 따라주겠니?     


 주변의 육사, 삼사, 학군 동기들을 보며 ‘이제는 명확히 내 신분은 군인이고 장교이기 때문에, 그에 걸 맞는 노력을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큰 영감을 준 동기들에게 감사하다. 그래서 나는 “나를 따르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장교까지는 아니더라도, “나 좀 따라주겠니?”라고 비교적 부드럽고 설득력 있는 리더십을 가진 장교가 되도록 준비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육훈련에 좋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기본 이상은 할 수 있도록 열정을 다했다.     


 교육훈련 중 기억에 남는 세 가지를 꼽으라면, 유격훈련, KCTC과학화전투훈련, 정신전력교육이다. 유격훈련은 4박5일 간 ‘동복유격장’에서 진행되었다. 여러 장애물 코스를 극복하고, ‘도피 및 탈출’이라는 과제를 무사히 완주했을 때 뿌듯했다. KCTC과학화 훈련은 강원도 철원 산골짜기로 이동해서 11박12일 간 ‘전투훈련’을 했다. 텐트를 치고 생활하고, 흐르는 시냇물로 씻었다. 과학화된 훈련 장비를 착용하고, 실제로 대항군과 전투를 했다. 험한 산골짜기에서, 하달받은 명령을 토대로 공격과 방어를 진행했던 경험은 ‘내가 진짜 군인이 되었구나.’라고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특히 방어 작전을 할 때는 3일 내내 비가 왔다. 밤새 비를 맞으며 저체온증에 걸린 이들이 대다수였다. 정말 힘든 경험이었지만, 이제는 웃으며 추억할 수 있는 훈련이다. 마지막으로 정신전력교육은 내가 유일하게 자신 있는 과목이었다. 국가관, 안보관, 군인정신을 다루는 정신전력 과목은 조별로 발표하고 질문과 답변의 시간을 가지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다양한 주제로 발표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정치외교학과 출신’이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작용했던 순간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상무대 수료 전 4학급 동기들과 찍은 사진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4개월이 끝났다. 함께 구르고, 놀며 친해졌던 동기들과의 시간이 가끔 그립기도 하다. 주말마다 만났던 학군단 동기들과의 모임도, 같은 고등학교 출신의 학군 동기 모임도 정말 즐거웠다. 당시에는 출타를 나가지 못한다는 아쉬움과, 힘든 훈련에 대한 피로와 두려움이었지만, 지금은 ‘동기들과 함께 한 추억’으로 기억된다. 너무 훌륭한 동기들과 생활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각자의 위치에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동기들의 안녕과 앞날을 기도한다.     


 (다음 화 예고) : EP5. 자대 전입, 안소위의 대구행(feat. 200만원 아반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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