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시는길에
선종하신지 1년이 지났다. 다시금 그 순간, 그 날들이 떠오른다. 을씨년스러웠던 3월의 날씨였다. 밖은 춥고 회색빛이었다. 장례의식을 준비하느라 잠시 장례식장에 들렀다. 장례식장 안에 꽃이 한가득 꾸며져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정면 가운데만 조금 있어서 '헉,~~이게 뭐지' 깜짝 놀라고 허전했다.
그마저 윗부분은 조화로 흰색이 누렇게 되어 있었다. 중앙에 있는 하얀 국화만 생화였다. 장례식장에 항의하고 싶었으나 우리를 도와준다는 장례지도사는 안된다고 그냥 있으라 한다.
-다 그런다고~.
유난히 꽃을 좋아하셨던 아버지셨다. 집안에서는 화초들을 가꾸며 소일하셨고 다 죽었다고 내놓은 화분도 정성을 다해 살려내시는 아버지셨다. 덕분에 우리 형제들도 집에서 식물들을 잘 가꾸며 꽃이 피었다고 자랑하고 카톡에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우리들이 어렸을 적에 살았던 한옥 집의 현관 입구에는 '꽃씨 뿌리는 마음'이라는 족자가 현판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개나리 목련 동백 벚꽃 등 갖가지 꽃들이 피어나는 유달산의 봄을 무척이나 사랑하셨던 아버지시다.
가시는 길을 꽃으로 화려하게 꾸며드리고 싶었다. "아버지, 빛을 보고 꽃길따라 가세요" 마지막 아버지를 보내며 귀에 대고 속삮였는데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무력함을 느꼈다.
죄송한 마음 그득했다. 그곳 장례직장에서는 가장 큰 vip룸이라는데도 꽃장식 하나 제대로 해드릴 수가 없었다. 동생은 이렇게 해놓고 몇백만원이라고 투덜된다. 어쩔 수없는 상황이다. 장례식장은 갑이요 유가족들은 을이다. 유가족들은 슬픔을 견디느라 그러려니하고 지나간다.
옆에 꽃바구니를 크게 해서 양쪽에 올려놓아야 할까? 이궁리저궁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 3시 경에 선종하셨는데 외국에 있던 동생이 오고있는 중이라 해서 저녁 7시가 지난 뒤에야 영안실에 모셨다. 빈 室이 없어서 다음날부터 사흘동안 사용할 방을 들여다보고 나오는 길이다.
아버지방 책상 앞에 앉아 아버지의 숨결을 느끼며 아버지의 일상을 무성영화 활동사진 돌리듯 하나하나 필름을 넘기게 되었다. 여러가지의 펜들이 오른쪽에 있고 일기를 쓰셨던 공책들이 모아져 있었다. 신구약성경을 두 번이나 필사하셔서 주교님으로부터 상장도 받으셨다. 몇 권의 일기장과 엄마와 찍으셨던 사진들, 성경묵상글, 탁상달력, 손때 묻은 성경과 커다란 묵주가 눈에 띄었다. 한참을 아버지 의자에 앉아 있다가 불현듯 좋은 생각이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사진들을 모아놓은 판넬이 거실에 있다. 생전에 아버지의 뇌를 깨우기 위해,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많이 하시게끔 했다. 그 사진들을 두개의 판넬에 정리해서 꽂으면서 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울다가 웃다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기가 설악산이었지 그때만 해도 짱짱하셨는데 소리소리 지르시고.
-여긴 이디아커피숍이네 이곳에서 카라멜마끼야또를 시켜드리면 맛있게 드시며 책을 읽고 계셨는데
-와 우리아버지 화가시네 그림그려놓고 흐뭇해하시면서도 부끄러워하시는 순진무구한 표정 좀봐.
사진들로 가득채운 판넬 두 개와 손떼 묻은 일기장, 묵주등을 챙겨 장례식장으로 갔다. 꽃이 부족하여 허전했던 영정사진 양옆을 아버지 사진들로 채우니 참 흐뭇했다.
손때 묻은 아버지의 유품들과 생전에 좋아하셨던 예수님상과 성모님상도 함께 놓았다. 아버지와 우리들이 함께 했던 추억을 되새김하니 장례식장이 슬픔보다는 따뜻함이 가득한 느낌이었다.
아버지의 孫이 현재 51명 모두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로부터 신앙의 유산을 받았다
덕분에 함께 연도를 바치고 미사하고 성가를 부르니 장례식장에 기도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동안 고생들했다.
서로 우애하며 잘 살아라.
항상 주님을 가운데 모시고 믿음으로 사랑으로 주변을 돌보며 살아라"라고
말씀하시는듯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
사랑합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아버지
덕분입니다 아버지
아버지 가시는 길에, 꽃보다 더 아름다운 찬양소리와 사랑의 마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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