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양철 지붕집 큰 딸 1.
천변을 걸으며 석류나무꽃을 보았다. 석류꽃의 맑은 주홍 빛이 나를 작은 꽃밭이 있는 옛날 어렸을 적의 집으로 데려간다. 그 집은 지붕이 빨간 양철로 되어 있었다. 여름이면 분꽃, 봉숭아, 더 작은 채송화꽃들이 피어 있는 크지 않은 꽃밭이었다. 좀 큰 나무로는 봄에는 노란 황매가 피고 유카가 봉오리를 틀고 올라갔던 꽃밭. 나는 석류나무 꽃은 피는데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고 투덜댔었다. 동화책을 보면 어느 집의 정원이 나오는데 아무리 봐도 우리 집은 정원이 아닌 꽃밭이 있는 집이었다. 그 옆에는 크고 작은 항아리가 몇 개 있었다.
목포시 남교동 불종대라는 동네였는데 불종대는 일제강점기에 마을에 불이 나면 종을 쳐서 알리는 곳이다. 철탑 같은 것이 높이 올라가 있어서 그곳을 불종대라 했다는데 어린 나는 보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동네이름을 불종대라고 불렀다. 그곳은 골목까지 합하면 오거리인 작은 상가지역이었다.
우리 집은 그중에 유달산으로 오르는 길목 도롯가에 있었다.
건너편에는 커다란 방앗간이 있었고 옆집은 기름집이었고 그 옆은 쌀집이었다.
문간채에 방이 두 개 있었고 안 채에는 안방과 건넌방 그사이에 마루가 크게 있었다.
마루 앞 토방이 있는 곳에서 몇몇의 아주머니들이 웅성 인다. 아주머니들은 아마 우리 집 일을 도와주시는 외숙모와 또 친척들인 듯하다. 아들일까 딸일까로 의견이 분분하였다.
나는 마루에 있었는데 안방에서는 엄마의 신음소리와 아버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병원에 가자는데 안 간다고 엄마가 우기고 있었다.
산파(조산원)를 불러오게 하고 시간이 지체된 후 산파가 왔다
그때까지 우리 집은 딸이 다섯이었고 마지막에 아들이 하나 있었다. 딸 많은 집이라고 엄마는 부끄러워서 병원에 안 가신다 한 것이다
나는 큰 딸이었고 중학생이었다.
엄마의 고통스러운 소리에 나는 울고 있었다. 그 시절에는 산전에 아들 딸을 미리 알 수 없었고, 남아선호사상이 드셌던 시절이라서.
얼마나 시간이 지난 후 산파 아주머니가 나오시면서 딸이라 했다. 웅성거리던 아줌마 중에서 누구였는지는 모르지만 또 딸을 낳았다며 엄마를 나쁘게 말해서 내가 막 울었다. 그리고는 대야에 피가 벌건 천들이 나오고 아주머니들은 빨래를 하고 부엌에서는 물이 끓고 그 뜨거운 물들이 방으로 들어갔다. 빨갛게 피 묻은 천이 담긴 대야가 눈에 선하고 그 순간들이 한 편의 영상처럼 돌아가고 있다. 빨간 지붕집에서의 잊히지 않는 한 장면이다.
엄마는 울었다. 또 딸이라고.
부모님은 아들이 하나 있는 데도 아들을 원했던 것 같다.
성당에 다니는 사람으로서 병원에 가서 일을 저지를 수가 없었다 한다.
그날 우리 집은 여섯째 딸이 태어났다. 동생이 태어났는데 나는 울었다
몇 년 후 나는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유학을 왔고 아버지는 서기관 시험을 위해 서울에서 교육 중이셨다. 어느 날 아침 등교 전인데 전화벨이 울렸다. 아버지가 받으시고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씀이 없으셨다. 한참을 기다렸다. 아버지께서는 또 딸이라고 하셨다.
그때도 나는 울었다. 동생이 태어났는데 등굣길에 훌쩍였다. 그냥 옆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싫어서, 엄마가 슬퍼해서 울었던 것이다. 이번 동생은 아버지도 안 계시고 산파도 부르지 않고 하나뿐인 언니(저의 이모)를 오라 해서 애기를 받으라 했다 한다. 딸이라 하자
-언니 저 윗목에 던져 놓소.
이모는
-안 하련다 내가 죄받으라고야 하셨고.
얼마나 딸 낳은 것이 부끄러웠으면 그랬을까 엄마 탓도 아닌데. 그땐 그랬다.
우린 팔 남매, 칠공주집이 되었다.
그랬던 막내딸은 우리들이 다녀보지도 못했던 유치원도 다니고 귀염을 독차지했었다.
엄마와 나의 눈물을 흘리게 했던 막내딸이 엄마 아버지 노후에는 서울로 모시고 가서 서울시민으로 살게 했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멋쟁이 할아버지로 할머니로 돌보며 효도를 했으니
-엄마, 막내 안 낳았으면 어쩔뻔했어
하고 웃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