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윈윈 하는 사이

by 김미희랑여데레사

어제는 하동 쌍계사에 다녀오면서 1년여 동안 상담교사자격연수를 받았던 때를 얘기했었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시절이라고 자부한다. 물론 자격연수반에 들어갈 때도 커트라인이 높았는데 우리 둘은 대학원에서 교육심리를 전공했기에 플러스 점수가 있어서 합격했다.


근무하면서 1년을 공부하는 과정이었다.

퇴근하고 교육대학교로 이동하여 밤 10시까지 수업을 받아야 했다. 미장원에 갈 시간도 아꼈던 기간이었다. 긴 머리에 핀을 꽂고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무엇을 어떻게 해 먹고살았을까? 다행히 아들들은 기숙사에서 생활했었고, 오직 책과 씨름하며 근무하던 1년이었다.

왜냐하면 30명 중 1~3등은 되어야 필요한 점수를 얻을 수 있기에 아주, 아주 열심히 했었다. 상대평가라서 30명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한다는 그런 공부와 경쟁 모드였다. 밤늦게 귀가하고 출근하는데 그 아침에 만나는 우리 반 아이들이 그토록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일찍 출근하여 등교하는 학생들을 맞는다. 교실에 들어오는 대로 엄청 큰 리엑션으로 애들을 놀라게도 하고 웃게도 했던, 그리고 껴안아주곤 했다. 아마 상담에 대한 공부 덕분에 아이들을 좀 더 깊게 이해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자격연수 점수획득에 큰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열심히 공부했던 추억으로 간직한 시간이다.




큰아들이 중학교 3학년 때 과학고 엄마들이 써놓은 글을 읽게 되었다. 대부분 함께 책을 보고 함께 공부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도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었다. 그때부터 승진할 때까지 아들들과 함께 열공이었다.

출석도 문제였지만 학위 논문 통과하느라 있는 힘을 다 했었고 학위수여식에 부모님과 두 아들이 함께 축하해 주는 기쁨도 얻었었다



몇 년간 우리 부부는 교사에게만 주어진 특권(방학)을 반납하고, 방학만 되면 연수받으러 다니고, 도서관 찾아다니며 공부를 했다. 내가 있는 곳엔 남편이, 남편이 있는 곳엔 내가 항상 함께 하며 몇 년간 원 없이 공부하였다. 같은 공부를 하기에 이동 중에도 강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강의하신 분 흉도 보고 그럴 수 있겠다고 이해도 했다. 손바닥을 마주쳐 하이파이브하고 웃기도 했다.


그 시절엔 60시간 연수받고 그 평가에서 거의 100점을 맞아야 하고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의 연수결과가 좋아야 했다. 쓰리 100! 세 번의 100점이 필요했다. 교감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소수점 이하 네 자리까지의 점수 계산으로 순위가 메겨지던 시절이다. 나는 소수점이하 네 자리 인생이라는 얘길 하면서 많이 속상해하고 우울하기도 했었다. 연구점수와 연수점수를 잘 받아야 해서 학기 중에 근무할 때보다 시간의 여유가 있었던 방학이면 공부하느라 더 바빴다.



강의가 끝나면 가까운 도서관을 찾는다. 그리고 밤늦게 도서관 문을 닫을 때 사서와 함께 귀가한다.

교육대학교도서관, 학생교육문화회관, 서구문화센터도서관. 서영대학교도서관등 집 주변의 도서관을 찾는다. 휴관인 줄 모르고 갔다가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도 했었다.



다행히 우리 부부는 서로 윈윈 하는 사이인 덕분에 공부도 집안일도 함께 했었다. 여자일 남자일 구분이 없다. 청소도 빨래도 시간 되는 대로 한다. 요리만은 내가 맡는다. 대신 어지러 놓은 뒤처리는 남편 몫이다.

직장동료이면서 부부인 우리다.


몇 년 동안 승진을 위한 점수 확보를 위해 방학을 보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점수는 다 확보했다. 남은 것은 경력!

이제 세월만 가면 된다. 근무 연한 25년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해외여행을 시작했다.


무슨 책이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최인철교수는

'여행은 행복의 종합선물, 여행은 뷔페이다. 여행은 체험을 위한 소비이다'라고 하셨다.


첫 여행지는 서유럽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아들 편지 중 일부이다

'엄마아빠 이제 공부 그만하시고 편안히 쉬셨으면 좋겠어요 동생과 저는 알아서 할 일 잘하겠습니다

여행 잘 다녀오세요'

없는 시간 쪼개어 공부하는 부모가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지금도 아들은 전화하면 엄마 쉬면서 서서히 하세요 하며 안부를 살핀다.


행복의 종합선물을 듬뿍 받고자 여기저기 방학이면 찾아다녔다. 여름 겨울방학을 이용하니 1년에 2번은 해외여행을 당연히 가는 것으로 계획이 되어 있었다. 좀 더 젊었을 때 멀리 다니고 나이 들면 가까운 곳에 다니자는 계획이었다.


나이아가라폭포와 캐나나 퀘벡을 가려고 할 때는 투자신탁에 넣었던 적금을 깨고 갔었다. 그 시간이 중요했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생각해도 잘했던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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