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차와의 만남
치앙마이에서 알게 된 양언니네랑은 올겨울에는 함께 라운딩 할 수 있는 시간이 안되어서 토요일 오후면 수영장으로 놀러 오신다
집으로 오셔도 좋지만 우리도, 그분들도 햇빛을 좋아하기에 야외에서 보기로 했다.
나는 먼저 포트에 물을 엊는다.
이곳에서 가장 좋다는 석회 걱정 없는 미네르상표가 붙은 물이다.
차는 우선 물 맛이 좋아야 한다. 광주에서는 삼다수를 사용한다.
그동안 해괴(뭉쳐져 있는 차를 조심스럽게 떼어낸)한 보이차 봉지와 겨우 있는 찻잔 4개를 준비한다. 찻잔받침도 없다.
타바론티팟(거름망이 있는 차우림용기)과 큰 보온병(600ml 정도) 2개도 준비한다
포트의 끓인 물을 보온병 2개에 담는다. 한 개에는 물을 덜 담는다.
수구(식힌 물이나 차를 따르는 그릇)로 쓰기 위해서다.
오늘 다식은 수박과 파파야다.
예쁘장한 통에 먹기 좋게 썰어 놓은 파파야를 넣고 그 위에 레몬을 조금 짜서 뿌린다. 상큼함이 파파야의 맛을 돋운다. 또 한통에는 보기 좋게 수박을 넣는다. 다식통 뚜껑은 연두색인데 수박과 파파야를 넣으니 색감이 맛을 더한다. 준비한 것들을 넣어 들고나갈 차바구니가 없다. 아무려면 어떠냐 티팟과 찻잔, 차봉지는 예쁜 손가방에 넣고 다식과 보온병은 다른 큰 가방에 넣는다. 다건이 없어서 치킨 타월을 예쁘게 접어 준비하고 다포대신 내가 아끼는 큰 손수건을 준비하여 가방 위에 넣었다.
수영장에 도착하니 벌써 수영을 하고 계셨다.
한쪽 탁자에 예쁜 수건을 먼저 깔고 준비해 간 보온병과 찻잔을 내놓고 수박과 파파야를 가지런히 놓는다. 보이찻잎을 티팟에 넣고 약간의 물로 세차해서 버린 후 덜 채운 보온병의 물로 티팟을 채운다. 자사호(보이차를 우려내는 중국 운남성의 자사로 만든 다관)가 아니면 어떠리 정성껏 우려 내면 맛있는 차가 되리라는 믿음으로 차를 내린다.
그동안 찻잔을 덥힌다.
차를 내리는 동안 다식도 드시고 말씀을 나눈다.
수구가 없는 대신 비워진 보온병에 티팟에서 우려진 차를 내린다.
보온병의 차를 찻잔에 정성껏 따른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며 흐뭇한 미소로 차를 드신다. 이렇게도 보이차를 마시게 되네요. 아주 좋다며 잔을 비우신다. 파파야도 수박도 보이차와 어울리는 다식이 되었다. 다른 보온병의 물로 두번째 우려서 마신다. 깔끔한 찻자리는 아니어도 정성껏 있는 만큼의 다기로 우려 마시는 보이차가 어느 때보다도 맛있었다. 생활차라는 말이 생각났다.
차문화협회에서 규방다례를 배웠다. 규방다례란 조선시대 양반가에서 차를 마시는 차례를 재현하는 것인데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규방(아녀자들이 거처하는 방)에 세 분의 손님을 모시고 녹차를 우려서 대접하는 시연과 다식을 내놓는 시연을 거쳐서 차예절 지도 사범 자격증을 받았었다.
70~80도의 물에 적당량의 찻잎을 차시로 떠서 다관에 넣는다. 차의 탕색은 보고 음미하며 먼저 맛을 보고서야 손님께 드시라고 권했던 모습들이 스친다. 차를 따르는 순서와 마지막 옥루까지 따라 내었을 때의 기쁜 마음도 느껴진다. 심사위원들이 앉아 계시는데 찻상을 들고 문지방을 넘어갈 땐 손이 떨려 찻상 위의 찻잔들까지 떨릴 정도였으니 내심으론 힘든 과정이었다. 손님들과 차를 우려 마시고 정담을 나누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물론 시연을 할 때는 예쁜 한복을 차려입고 곱게 앉아 대접한다.
사범자격증을 받은 후로는 규방다례는 행사 때 시연 용으로 사용하고 생활차 중심으로 차생활을 해오고 있다. 봄이면 보성이나 쌍계사차밭에 가서 제다 하는 것이 연례행사가 되었다. 제다(製茶)한 햇차를 마실 때는 입안 가득 상큼함과 차밭의 풍경들이 눈에 아른 거리며 오감으로 마시게 된다. 차를 우려마신 후의 엽저(우려낸 후 찻잎)도 잎이 그대로 살아있어서 참기름 조금 넣고 깨소금 솔솔 뿌려 먹으면 차밭에 앉아있는 듯한 느낌도 받는다. 나이가 들면서 녹차는 오전 중에만 마시고 주로 보이차를 즐긴다. 까다로운 다법보다는 편리하게 차를 우려 마시지만 좋은 보이차를 좋은 자사호에 우려 예쁜 찻잔에 마시면 황홀하기까지 한다.
차를 함께 공부했던 도반들과 한 달에 한 번 묵수당에 모여 20년 이상된 보이차를 묵수당의 당주님이 우려 주실 때면 손끝 하나하나 손놀림이 예술이다. 우린 차를 수구에 담아 주시는 자태가 곱고 자연스럽다. 정담을 나누며 그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는 행복 가득이다. 차로 만난 인연 들이라서인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며 나눔을 즐긴다. 茶詩를 낭송하고 동다송, 다신전등 차에 대한 서적을 읽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또 다음 모임날을 기다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