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뭐 먹고살지. 인생 참 더럽게 안 풀리네.”
넋두리할 대상이 있으니 혼잣말이란 핑계로 별얘기를 다한다. 선배와 얼큰하게 취하니 속에 있는 응어리들을 다 헤쳐놓고 시장통의 상인처럼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웅변을 하는 나를 보고 있자니 머릿속에 남아있는 체면이란 놈이 절레절레 고개 젓는 모습이 보인다. 그래도 웅변은 멈추지 않는다.
“형이 얼마나 도와줬는데, 참 면목이 없다.”
시작만 창대했던 내 웅변은 선배에 대한 미안함에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움츠러들었다. 잘못한 강아지가 주인을 쳐다보듯 선배를 흘겨보니 선배의 모습도 이상하게 처연했다. 그동안 선배를 자주 보진 못했다. 수험생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칙이 있다면 ‘은둔’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통화만 몇 번 하고 보지는 못했다.
오래간만에 선배를 봤다고 해도 이렇게 2년 만에 사람이 수척하게 변해 있을지는 몰랐다. 나도 모르게 큰 병에 걸린 것 같으니 검진을 받아보라는 오지랖을 부릴 뻔했다. 여하튼, 빛나던 선배의 모습을 잘 아는 나로서는 이해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선배는 드라마에 나오는 교회오빠의 전형이었다. 큰 키와 호감형으로 잘생긴 얼굴은 처음 보는 사람도 무장해제시켰고, 성격은 진중했지만 남들이 던지는 농담도 못 받는 숙맥은 아니었다. 신중했지만 열정적이었고,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지만 타인에 대한 동정심은 많은 그런 사람이었다. 누구나 좋아하고 동경할 그런 사람이 선배였다.
“형 근데 무슨 일 있어? 왜 그렇게 근심이 가득한 표정이야? “
“응. 내가 요즘 좀 정신이 없다.”
사실 내가 선배에게 시험에 떨어진 것 말고 미안한 건 또 있었다. 수험 3년 차에 선배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시험기간과 겹쳐 장례식에도 찾아가지 못했다. 경사는 빠져도 되지만 조사는 꼭 가야 하는데, 가장 친한 선배의 조사에 불참하게 되니 면목이 없었다.
“아버지 돌아가신 거, 그거 아직 범인 못 잡은 거지?”
“응.”
짧지만 긴 침묵이 흘렀다. 화제를 전환해야 했다. 자살소동을 벌인 나를 위로하는 자리지만 내가 선배에게 더 미안한 말을 꺼내고 말았으니 위로받을 주인공이 바뀐 것이다.
“아! 형 요번에 과장으로 승진했다며? 입사 2년 만에 과장 승진이면 초고속 승진 아니야?”
선배는 이름을 대면 알만한 건설사에 입사했다. 들어가서 6개월 만에 대리를 달더니 이제 2년 차인데 벌써 과장이 되었으니 말도 안 되는 고속 승진이었다. 남들이 수군거릴만한 스캔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선배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아냥이 아닌 진정한 축하를 할 수 있었다.
“네게 할 말이 많아. 그렇지만 너 몸 좀 추스르고 말할게.”
‘회색집’을 나와 선배와 같이 다니던 대학교를 걸었다. 선배와 같이 익숙한 길을 걷다 보니 선배와의 추억도 생각나고, 즐거웠던 기억들이 몰려와 쓰린 수험생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 같았다.
길을 걸으며 가족보다 더 가족같이 의지하고 기대는 사람이 한 명쯤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선배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위로했고 나는 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딴생각 말고. 조만간 연락할 테니 전화받아 인마. 알겠지?”
“어, 형 고마워.”
“고맙긴 뭘, 살아 있어서 고맙다. 네가 내 동생이라서 다행이야.”
“왜?”
“형이었음, 골치 아팠겠다 싶어. 한 대 쥐어박지도 못했을 거 아니야. “
“그래 나도 형이라 다행이야. 맘껏 대들 수 있으니까. 하하.”
우린 우애 좋은 형제 같았다.
며칠이 지났다. 탈락의 상실감을 덜어내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궁리를 했다. 큰 계획은 떠오르지 않아 취직이라도 해서 인간답게 살아보려고 자기소개서를 썼다. 나름 목표도 있었다. 선배가 다니는 회사에 지원하려 했다. 건설회사는 내 전공과는 전혀 관계없는 회사였지만 들어가고 싶어졌다. 선배 밑에서 선배를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 마음의 빚은 컸다.
마침 선배가 다니던 건설회사의 입사지원기간이었다. 자소서를 완성하고 선배에게 퇴고를 받을 생각이었다. 취업하려는 회사 에이스가 나랑 가장 친한 사람이라니 든든함에 마음이 부풀었다. 숙제검사를 받는 아이의 두근거림으로 선배에게 전화를 걸려던 찰나였다. 선배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형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딱 내 마음을 알고 전화를 주셨나 몰라.”
능청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문필 동생 문지영이에요…”
민망함에 목덜미가 차가워졌다.
“아. 예. 하하. 죄송합니다. 형님인 줄 알고 그랬네요. 근데 무슨 일이시죠?”
잠시동안 흐른 정적은 내게 그나마 숨 쉴 기회를 제공했다.
그녀의 말이 있고 난 후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아… 실은… 어제 오빠가 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