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몸이 맘대로 안 움직인다.
어느 운동이 그렇지 않겠느냐만 클라이밍은 진심 전신을 사용하는 운동이다. 주로 팔로 매달려있기에 또 클라이밍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팔뚝에 고구마 하나쯤은 키우고 있기에 (전완근만 발달해 고구마를 키운다고 표현한다) 팔 운동이라 생각하지만 직접 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 같은 경우에도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팔 근육이다. 예전에 팔이나 어깨를 만지면 말랑말랑 젤리 같았는데 3년 차쯤 되니 이제 조금은 단단해진 것을 느낀다. 그리고 미약하게나마 나의 팔뚝에도 조그마한 고구마가 자라고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 이럴 뿐 인바디를 측정해 보면 결과가 상의하게 다르다.
인바디를 처음 쟀을 때만 해도 전신의 근육량은 평균 혹은 미만이었는데 요즘은 종종 평균 이상이 발견되기도 한다. 당연히 팔의 근육량이 평균이상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실상은 하체 근육이 평균 이상이라는 사실. 처음 결과지를 보고 놀라긴 했으나 운동을 할 때 모습을 상상하니 이 결과가 단숨에 순응되었다. 그렇다 클라이밍은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다리 근육을 사용하는 운동이다.
운동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팔 혹은 손의 감각만으로 운동을 더 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판단할 수 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몇 번하면 손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으며, 전완근의 펌핑 강도로도 홀드를 앞으로 몇 개 더 잡을 수 있을지 대충 짐작이 간다. 하지만 다리는 도대체가 알 수가 없다.
그날도 그랬다. 심지어 그날은 스트레칭 이후 제일 처음 붙는 판이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통상적으로 몸을 풀고 붙는 첫 번째 판이 체력이 제일 좋기에 완등할 가능성이 가장 높아 오늘은 왠지 모르게 완등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을 갖고 벽에 붙을 준비를 했다. (나는 매일 완등을 꿈꾸고 매일 좌절한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조금은 지치고 조금은 체력이 달리긴 했지만 특별한 점 하나 없던 그날. 다리를 쓴 것 이라고는 고작 암장에 걸어오는 10분 남짓의 시간이 전부인 그날. 뒷일은 상상도 못 한 체 번호 하나하나를 잡아 나가기 시작했다. 호흡도 안정적으로 잘 되고 팔도 덜 아픈 느낌? 오늘 진짜 완등 각이잖아?
이미 문제를 푼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 문제에 적응하기도 했고, 바로 전날 딱 한 번 떨어졌기에 인지하지 못했지만 자신감이 뿜뿜 했었나 보다.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별 무리 없이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덧 내가 잡고 있는 홀드는 30번대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 정도의 호흡이면, 이 정도의 펌핑이면 오늘 진짜 완등각이다!! 점점 들떠오르는 마음을 다잡으며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진심 평온하게. 진심 스무스하게 말이다.
그리고 어느덧 문제는 40번. 힘들긴 하지만 여전히 팔은 20번 이상 잡을 힘이 남아있음을 느꼈다. 오늘은 진짜 완등이다.라고 생각하고 다리를 홀드에 디디는 순간 응? 뭐지? 발이 왜 이리 안 찍히지? 팔에 힘이 넘쳐서였을까요? 갑자기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이 오묘하고 신기한 인체. 역시 인생은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지. 어찌어찌 그 구간을 돌파하고 쉴 수 있는 홀드를 향해 달려갔다. (정말 달려갔다는 표현이 맞다. 나는 호흡도 하지 않고 무작정 돌파했다.)
그리고 당도한 쉬는 홀드. 호흡을 가다듬으며 매달려 쉬고 있는데, 갑자기 다리가 덜덜 떨려오는 게 아닌가? 가만히 다리를 디디고 서있고 싶은데 내 의지와는 1도 상관없이 다리가 덜덜 덜덜 떨려 왔다. 일명 오토바이 타기. 이놈의 오토바이 타기는 꼬꼬마 시절 졸업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게다. 내가 방심한 틈을 타 다시 내 몸에 접신한 것이었다.
암장에서 운동하기 시작했을 무렵 홀드에 매달려 쉬려고만 하면 팔이 아픈 건 둘째고 다리가 덜덜 덜덜 떨려와 도무지 쉴 수가 없었다. 그럼 뒤에서 다른 선배님들이 제 또 오토바이 탄다. 하고 놀려댔다. 내려와서 왜 이런 거냐고 물으니 다리의 근력이 부족하여 그런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꽤 열심히 하체 운동을 했고 한동안 오토바이 타기는 나와 결별을 했었다. 하지만 이 절체절명의 중요한 순간 다시 오다니. 이놈의 망할 놈의 몸뚱아리!!
아무리 노오력 해도 덜덜거리는 다리를 멈출 수 없었다. 그렇다고 도전을 포기할 수도 없다. 얼마 만에 온 완등의 기회인데. 얼마 만에 내 팔이 60번의 홀드를 잡을 수 있다고 신호를 준 건데.. 다리야 미안하지만 20개만 더 버텨줘. 그 이후에는 푹 쉬게 해 줄게. 간절히 다리에게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이번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버텨달라고 말이다.
다리가 덜덜 떨리는 탓에 제대로 쉬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팔의 펌핑이 풀리고 호흡이 돌아왔기에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니 팔의 힘을 더 써야 했다. 힘은 들었지만 오늘은 꼭 완등을 하고자 하는 의지로 전력을 다해 하나하나 홀드를 잡아갔고 그날 결국 나는 꿈에 그리던 완등을 했다.
꺄올. 얼마 만에 완등이냐. 넘나 행복한 것.
행복감에 탑 홀드를 양손으로 잡고 벽에서 폴짝 뛰어내리는 순간 분명 다리에 힘이 들어가 두 발로 서야 하거늘 내 다리는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 자식. 너 전력을 다했구나. 오토바이 탈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그래도 버텨줘서 감사해 다리야.
그렇게 한동안 나는 탑 홀드 밑에서 주저앉아 미친 듯이 웃어댔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도 행복하긴 겁나 행복하거든요.(사실 일어날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이게 바로 완등의 맛 아니겠습니까? 물론 갑자기 작동을 안 한 멍청한 다리 때문에 팔의 힘도 다 써서 손을 덜덜 떨었던 건 안 비밀이지만 말입니다.
완등을 했지만 그 이후 오토바이를 타는 횟수가 현저하게 늘었다. 아니 도대체 운동을 더 열심히 하는데 실력이 더는 거 같은데 오토바이는 왜 자꾸 타는거야? 나 하체 운동도 해야하는거니? 그럼 도대체 나는 언제 쉬어? 진짜 클라이밍이란 세계는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매력적인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