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한 볼 일 때문에 서귀포 갔다 오는 길.
한 소녀 아이가 버스에 올라타 앞자리에 앉는다.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
어느새 덜컹거리는 버스 창에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든다. 고단한가 보다.
얼마나 지난한 삶이 네 앞에 펼쳐져 있을지
저 소녀는 가늠하지 못하리라...
나는 제우스의 딸 판도라가
상자를 열었을 때 세상 모든 재앙은 다 날아가고 희망만 남아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은 헛된 희망이었단다.
다들 평생을 희망을 안고 산다.
아니 희망이라고 믿고 싶어 하겠지.
시지프스 형벌의 시작인지도 까마득히
모르는 채.
카뮈의 역설이있다.
"우리는 시지프를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시지프 신화는 삶의 허무를 인정하되,
그 허무를 딛고 일어서서 오늘 너의 하루를,
바위를, 기쁘게 밀어 올리라 한다.
"희망이 없다는 것이 곧 절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위안이 된다.
열어둔 버스 창가에 바람이 차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모든 존재가 한 줌의 모래알이다.
다 허언이고 허업이다.
다 뜬구름이다.
서귀포 넓은 가로수 길
버스 창가를 스치는 워싱턴 야자수가 어지럽다
집에서 어딜 다녀오다 새인지 쥐인지
길바닥에 무언가 터져 죽은 작은 주검을 보았다. 의식적으로 눈을 돌렸지만
그걸 스쳐 지나온 웬 여인이 오만상을 쓰고 지나간다.
아마 그 사체를 보았나 보다
일을 마치고 돌아 나와
휴대폰을 보며 무심히 걸었다.
물컹 발에 무언가 밟힌다.
순간 아까 보았던 그 작은 사체인가 하고
아차 했다. 지하철 화장실에 들어가 신발 바닥을 박박 닦아냈다.
알고 있었으면서 하필 그걸 밟았다니...
얼마나 많은 삶의 오류가 있었을까.
알면서 모르면서.
바로 내 삶의 궤적이 투영된다
한 치 앞도 모르며 살아온 지난날들의 교만함.
후회가 밀려온다.
황석영 선생이 티브이에 나왔다.
할매라는 신작을 들고.
선생님의 역사에 언제가 위기이고, 좋으시냐
사회자가 묻는다.
지금이 제일 좋다. 과거, 미래는 헛것이다.
선생은 올해 여든셋이다.
살다 보니 욕심, 욕망이 그득할 때가
살기 제일 힘들었단다.
그러나 욕심 욕망 없이 어이 사나,
욕망을 바르게 표출하면 된단다.
그게 쉽게 그리 되나?
어찌 그 깊은 뜻을 내가 알겠나.
심난할 땐 걷는 게 위안이다.
아무 생각 없이 물 한 통 들고 나선다.
저번에 걷다만 올레 6길 끝점 찾아간다.
남원까지 가는 올레 5길 역방향이다.
어둡기도 하지만 비가 제법이다.
쇠소깍까진 버스로 한 시간 넘게 걸린다.
걷기 시작한다. 한 시간가량 걸으니
비가 제법 세차게 뿌린다.
비를 피해 공천포 카페 지니 보이는 정자에 들어선다.
오늘 걷는 이유 중 하나가 카페 지니 쥔장 만나기 위해서다.
카페 지니는 빵과 커피를 파는 아담한 카페다.
실내에 몇 사람 어른거린다.
분주한 그에게 커피를 한 잔 시키고
나 아시겠냐고 묻는다.
글쎄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빵 정리 좀 하고요.
이 양반 나를 이곳 제주에 있게 만든
계기가 되는 장본인이다.
아! 신라호텔 설거지...?
맞아요 접니다.
바쁜 그를 앉혀놓고 이야기꽃이다
그동안 어쩌고저쩌고...
대평리 살고 서귀포 시내에서 국숫집 한다고 명함 건너니 예외 없이 놀란다.
자기 막국수 좋아한다고 먹으러 온단다.
이 양반을 4년 전 공천포 앞바다에서 만나서
여기까지 있게 됐다.
그동안 서로 살아온 이야기 나누다 보니
어느새 비가 멎었다.
지귀도 바라보며 위미를 지나 남원까지 걸었다.
5코스 13킬로 남짓 걸었다.
우울할 때 걷는 건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처방이다.
얽힌 실타래처럼 복잡한 심사가
조금 나아졌다.
아주 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