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정류장 전광판에는 '잠시 후 도착'이라는 문구가 차갑게 명멸하고 있었다. 한수는 숨을 들이켜며 습관적으로 숫자를 굴렸다. 다섯 글자. 5. 뒤이어 나타난 '702번'은 숫자 셋에 글자 하나, 도합 넷. 5와 4를 더하면 9. 불길한 숫자다.
그는 9를 짝수로 만들기 위해 옆에 서 있는 여자의 가방에 적힌 브랜드명을 기어이 읽어냈다. 'PRADA'. 다섯 글자. 이제 14가 되었다. 짝수. 그제야 한수의 가파른 숨이 잦아들었다.
이것은 병(病)이라기보다 형벌에 가까웠다. 카페에 앉아 메뉴를 고를 때도, 누군가와 안부를 주고받을 때도 그는 의미를 읽기 전에 글자 수부터 센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여덟 글자라는 이유로 선택되었고, "오늘 참 예쁘네"라는 연인의 고백은 '일곱 글자'라는 홀수의 불쾌함으로 기억 속에 박혔다. 세상은 그에게 거대한 산수 문제집이었고, 그는 단 한 문제도 틀려서는 안 되는 강박적인 수험생이었다.
그의 강박은 결핍에서 잉태되었다. 아홉 살의 한수는 칠판 앞에 서서 울음을 터뜨렸다. '학교'라는 두 글자가 도무지 읽히지 않았다. 그것은 의미를 가진 기호가 아니라, 괴물의 눈동자나 뒤엉킨 나뭇가지처럼 보였다. 난독증이라는 진단명이 내려지기 전까지, 그는 '글자를 먹지 못하는 아이'였다.
교실의 비웃음 속에서 한수가 찾아낸 생존 전략은 역설적이게도 '세기'였다. 글자를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것이 몇 개의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셀 수 있었다. 그는 단어를 뜻이 아닌 수량으로 외우기 시작했다. 사과는 두 글자, 운동장은 세 글자. 그렇게 숫자의 그물을 쳐서 글자라는 짐승들을 가두었다.
성인이 된 그는 이제 국내 유수의 출판사에서 교정교열가로 일한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글자를 읽지 못했던 아이가 글자의 잘못된 점을 찾아내는 파수꾼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교정은 문맥을 살피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문장 속의 글자 수와 띄어쓰기의 간격이 이루는 기하학적 균형을 감시했다. 오탈자는 그 균형을 깨뜨리는 침입자였고, 그는 그 침입자를 사살하는 저격수였다.
교정지 위에 놓인 시인의 문장, [나의 슬픔은 아무도 세지 못한 바다].
한수의 눈에는 그것이 열네 개의 비석으로 보였다. 평소라면 짝수의 안온함에 안도했겠지만, '슬픔'의 'ㅁ' 받침 끝에 맺힌 작은 먹점 하나가 모든 것을 뒤틀어버렸다.
그것은 글자도, 문장부호도 아니었다. 그저 잉크의 실수, 혹은 시인의 머뭇거림이 남긴 흔적이었으나 한수의 뇌는 그것을 '열다섯 번째 침입자'로 규정했다.
순간, 오른쪽 귀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치솟았다.삐이—.고막을 찢는 듯한 이명은 숫자의 균형이 깨질 때마다 찾아오는 불청객이었다. 15. 나누어지지 않는 홀수. 그 불길한 숫자가 머릿속을 헤집자 위장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입안에는 비린 침이 고였고, 방금 마신 커피가 역류하는 감각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는 책상을 움켜쥐었다. 손등의 핏줄이 터질 듯 솟아올랐다. 눈앞의 글자들이 개미 떼처럼 흩어지며 숫자로 변해 쏟아졌다. 1, 3, 7, 11, 15... 소수(素数)들이 화살이 되어 그의 미간을 찔렀다. 지워야 한다. 저 점만 지우면 다시 평화로운 14가 된다.
하지만 수정액을 쥔 손은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지우려는 의지와 지울 수 없다는 직관이 충돌하며 전신에 경련이 일어났다. 식은땀이 안경알 위로 떨어져 문장을 흐렸고, 그는 구역질을 참기 위해 입을 틀어막은 채 의자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도망치듯 사무실을 나와 정류장으로 향하던 길, 공원 벤치에 앉은 한 아이가 그의 시선을 붙들었다. 아이는 삐뚤삐뚤한 손놀림으로 크레파스를 휘두르고 있었다. 평소라면 아이의 옷에 새겨진 로고나 신발 끈의 개수를 세었겠지만, 한수는 홀린 듯 아이의 스케치북을 들여다보았다.
아이가 쓴 글자는 엉망진창이었다. "우리아빠 체고". '최고'를 '체고'로 잘못 쓴 오탈자. 띄어쓰기도 무너져 있었고, '빠' 자의 받침은 스케치북 밖으로 삐져나가 있었다. 한수의 뇌가 본능적으로 '여섯 글자, 맞춤법 오류'라는 진단명을 내리려는 찰나, 아이가 노란색 크레파스를 집어 들었다.
아이는 그 서툰 글자들 위로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리고 그 안에 눈, 코, 입을 그려 넣었다. 글자는 더 이상 숫자로 셀 수 있는 단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얼굴이 되었고, 웃음이 되었으며, 아이가 아빠에게 전하고 싶은 거대한 '마음의 덩어리'가 되었다.
글자의 획이 뭉쳐지고 색깔이 덮이는 순간, 한수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숫자들이 단번에 침묵했다. '체'인지 '최'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 투박한 노란색 덩어리가 주는 온기가 한수의 눈을 타고 들어와 시린 뇌를 어루만졌다. 그는 처음으로 글자를 세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사랑'을 보았다.
다시 돌아온 사무실은 고요했다. 밤샘 작업의 피로가 깔린 책상 위, 여전히 그 시집의 원고가 펼쳐져 있었다. 한수는 펜을 드는 대신 가만히 원고를 내려다보았다. 아까 흘린 땀방울이 '슬픔'이라는 글자 위로 떨어져 잉크가 번져 있었다.
이제 그 문장은 열네 글자도, 열다섯 글자도 아니었다. 땀에 젖어 번진 잉크는 종이의 결을 따라 제멋대로 뻗어 나가며 세상에 단 하나뿐인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정답도 아니고 오답도 아니었다. 완벽한 짝수도, 불길한 홀수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그 시간을 치열하게 견뎌낸 한수의 흔적이었고, 시인의 고독이 빚어낸 얼룩이었다.
한수는 책상 옆에 놓인 수정액을 서랍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ㅁ' 받침 옆의 작은 점과 자신의 땀자국을 교정 기호로 지우는 대신, 가만히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숫자의 감옥 벽에 작은 균열이 생기고, 그 틈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그는 조용히 원고 뭉치를 덮었다.
그는 이제 안다. 삶은 세어지는 것이 아니라, 겪어내는 것이라는 걸. 한수는 가방을 챙기며 사무실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도 그는 더 이상 글자 수를 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