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 위의 질문

과학 분야에서 일하는 인문학 전공자의 세계에 대한 질문 — No. 16

by 모따모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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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은 2128년, 지구 정지궤도 36,000km 상공에서 일한다.


그의 직함은 "위성 유지보수 기술자"다. 고장 난 인공위성을 수리한다. 우주복을 입고, 위성에 접근해, 부품을 교체하거나 시스템을 재부팅한다.


오늘도 재현은 정지궤도를 돌고 있다.


작업 대상: GEO-COMM-447. 통신위성. 태양전지판 고장.


재현은 우주정거장에서 출발해, 소형 추진기로 위성까지 이동했다. 36,000km. 지구가 아래에 떠 있다.


그는 위성에 도킹했다. 태양전지판을 점검했다. 배선 문제. 30분이면 고칠 수 있다.


재현은 작업하면서 생각했다.


이 위성은 정지궤도를 돈다.
24시간에 정확히 한 바퀴.
지구 자전과 같은 속도로.

그래서 항상 같은 곳 위에 떠 있다.
궤도. 정해진 길.


재현은 배선을 연결하고, 태양전지판을 재부팅했다. 정상 작동. 작업 완료.


그는 위성에서 떨어져 나와, 다음 작업 위치로 이동했다.


다음 대상: GEO-OBS-229. 관측위성. 자세 제어 장치 고장.


재현은 또 이동했다. 정지궤도를 따라. 36,000km 상공. 지구 주위를 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나도 궤도를 돌고 있다.

위성들처럼.

집 → 우주정거장 → 위성 → 수리 → 귀환 → 휴식 → 반복.

매일, 매주, 매달.

이것도 궤도다.

[과학자의 노트]

궤도의 물리학에 대한 짧은 메모.

궤도(Orbit): 천체가 다른 천체 주위를 도는 경로.

왜 위성은 떨어지지 않는가?
- 중력이 잡아당긴다 (아래로)
- 속도가 밀어낸다 (앞으로)
- 두 힘의 균형 = 궤도

정지궤도(Geostationary Orbit):
- 고도: 35,786km
- 주기: 24시간
- 지구 자전과 동기화
- 결과: 항상 같은 위치

궤도는 반복이다.
같은 길을 계속 돈다.
영원히.

인간의 삶도 궤도인가?


재현은 GEO-OBS-229에 도착했다. 자세 제어 장치를 점검했다. 자이로스코프 고장. 교체 필요.


그는 부품을 교체하면서 계속 생각했다.


이 위성은 왜 궤도를 도는가?


목적이 있다. 지구를 관측한다. 데이터를 보낸다. 인류에게 유용하다.


그럼 나는?


나는 왜 궤도를 도는가?


재현은 손을 멈췄다.




작업을 마치고, 재현은 우주정거장으로 돌아왔다.


동료 수진이 물었다. "오늘 작업 어땠어요?"


"별일 없었어요. 태양전지판 하나, 자이로스코프 하나."


"그럼 내일은?"


"GEO-NAV-334 안테나 정렬, GEO-COMM-558 냉각 시스템."


수진이 웃었다. "항상 비슷하네요."


"맞아요. 항상 비슷해요."


재현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창밖으로 지구가 보였다.


36,000km 아래. 푸른 별.


그는 자신의 일정을 열어봤다.


[ 재현의 6개월 일정 ]

월: 위성 수리 4-6개
화: 위성 수리 4-6개
수: 위성 수리 4-6개
목: 위성 수리 4-6개
금: 보고서 작성, 부품 재고 확인
토-일: 휴식

반복.
26주.
156일.

그다음 6개월도 같음.


재현은 일정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궤도를 돌고 있다.


위성들처럼.


하지만 위성은 목적이 있다. 통신, 관측, 항법.


나는?


재현은 지난 5년을 떠올렸다.


2123년: 입사. 위성 수리 교육.


2124년: 첫 우주 작업. 긴장했지만 성공.


2125년: 숙련. 하루 6개 위성 수리 가능.


2126년: 승진. 선임 기술자.


2127년: 반복. 같은 일.


2128년: 지금. 여전히 같은 일.


5년간 수리한 위성: 약 3,800개.


5년 후에도 같은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10년 후에도.


궤도.


나는 순간을 사는가, 삶을 사는가?

매일 위성을 고친다. 그게 순간이다.
하지만 5년을 돌아보면... 하나의 긴 궤도다.

순간들이 모여 궤도를 만든다.
그럼 나는 순간을 살았나, 궤도를 돌았나?

잘 모르겠다.


재현은 창밖의 지구를 봤다.


저 아래 70억 명도 궤도를 돌고 있을 것이다.


출근, 일, 퇴근, 식사, 수면. 반복.


그들도 나처럼 궤도를 도는가?


아니면 나만 그런가?




다음 날, 재현은 GEO-NAV-334로 갔다.


항법위성. 안테나 정렬 문제.


그는 위성 외부에 붙어 작업했다. 안테나를 조정했다. 지구 방향으로 0.3도 회전.


작업 중에, 재현은 위성을 보며 생각했다.


이 위성은 24시간마다 정확히 한 바퀴를 돈다.


같은 궤도를. 영원히.


하지만 이 위성에게 "지루함"은 없다.


그냥 돈다. 그게 전부다.


나는?


나는 지루하다고 느낀다.


그게 차이구나.


재현은 안테나 정렬을 완료했다. 다음 위성으로 이동했다.


GEO-COMM-558. 냉각 시스템.


그는 이동하면서, 자신이 돌아온 궤도를 생각했다.


지난주에도 이 근처를 지나갔다.


지난달에도.


작년에도.


같은 위성들. 같은 고장들. 같은 수리.


궤도.

순간들이 모여 궤도를 만든다.

매일의 수리 = 순간
5년의 반복 = 궤도

그럼 내 삶은 무엇인가?

순간의 합인가?
아니면 궤도 자체인가?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살고 있나, 돌고 있나?


재현은 GEO-COMM-558에 도착했다. 냉각 시스템을 점검했다.


냉매 누출. 보충 필요.


그는 냉매를 주입하면서, 갑자기 생각이 들었다.


이 순간.


지금, 냉매를 주입하는 이 순간.


이건 뭐지?


이건 "삶"인가, 아니면 "궤도의 한 점"인가?


재현은 작업을 멈추고, 우주 공간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다. 그냥 어둠. 별들.


그리고 36,000km 아래, 지구.


재현은 지구를 보며 생각했다.


저기 누군가는 나를 기억할 것이다.


가족. 친구. 동료.


그들이 기억하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위성 수리하는 사람."


그게 전부인가?


재현은 다시 작업을 계속했다. 냉매 주입 완료. 시스템 정상.


그는 우주정거장으로 돌아왔다.


◯ ◯ ◯


저녁, 재현은 수진과 함께 식사했다.


"수진, 질문 하나 해도 돼요?"


"뭔데요?"


"우리... 궤도 돌고 있는 거 아니에요?"


수진이 웃었다. "말 그대로 궤도 돌고 있죠. 정지궤도. 36,000km."


"아니, 그게 아니라. 삶이요. 우리 삶이 궤도 아닌가 해서."


수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위성들처럼요?"


"네."


"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위성은 목적이 있잖아요. 통신, 관측, 항법. 우리는?"


수진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우리 목적... 위성 수리?"


"그게 목적인가요?"


"잘 모르겠네요. 저는 그냥... 일하고, 돈 받고, 살아요."


"그게 궤도인 건가요, 삶인 건가요?"


수진은 오래 생각했다.


"재현 씨,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어요. 순간을 사는 건지, 궤도를 도는 건지."


"누가 우릴 기억하면, 그 순간들이 의미를 갖는다고 하던데. 그럼 우리 궤도도 의미가 있는 건가?"


"누가 우릴 기억하죠?"


재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가족은 지구에 있다. 1년에 두 번 만난다.


친구들은 연락이 뜸하다. 다들 바쁘다.


동료들은? 같은 궤도를 돈다. 서로를 기억하지만, 그게 의미가 있나?


수진이 말했다. "재현 씨, 너무 어려운 질문 같아요."


"미안해요."


"아니, 괜찮아요. 저도 가끔 궁금하거든요. 근데 답을 못 찾겠어요."


두 사람은 침묵했다.


창밖으로 지구가 천천히 돌고 있었다.


아니, 지구는 안 돌아 보인다. 정지궤도니까.


하지만 실제로는 돌고 있다. 24시간에 한 바퀴.


그들도 함께 돌고 있다.


나는 순간을 살고 있나, 삶을 살고 있나?

매일 위성을 고친다.
그 순간순간은 분명 실재한다.
나는 냉매를 주입하고, 배선을 연결하고, 안테나를 정렬한다.

하지만 5년을 돌아보면,
그 순간들이 하나의 궤도를 그렸다.

그럼 내가 산 건 순간인가, 궤도인가?

누군가 나를 기억한다.
그들은 뭘 기억할까?
개별 순간들?
아니면 "위성 수리하는 사람"이라는 궤도?

나는 누구지?
순간들의 합?
아니면 궤도를 도는 존재?


재현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내일도 위성을 수리할 것이다.


모레도.


다음 주도.


다음 달도.


언제까지?


모른다.


재현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위성은 궤도를 돈다.
목적이 있다. 통신, 관측, 항법.

나도 궤도를 돈다.
목적은?

잘 모르겠다.

그냥 돈다.
계속.

이게 질문인지 넋두리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궁금하다.

나는 순간을 사는가?
삶을 사는가?

답이 있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질문은 남는다.

내일도 위성을 고치면서,
이 질문을 안고 살 것이다.

답 없이.


재현은 잠들었다.


36,000km 아래, 지구가 돌았다.


정지궤도 위성들이 함께 돌았다.


재현도 함께 돌았다.


내일도 그는 깨어나서, 우주복을 입고, 위성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수리할 것이다.


그게 그의 궤도다.


순간인지, 삶인지.


그는 아직 모른다.


어쩌면 영영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계속 돌 것이다.


위성들처럼.


질문을 안고.


답 없이.


글 · 잡학도서관 모따모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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