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들이 멈출 때

과학 분야에서 일하는 인문학 전공자의 세계에 대한 질문 — No. 17

by 모따모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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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지는 2132년 부산의 '꿈 연속성 치료 센터'에서 일한다.


그녀의 직함은 "꿈 연속성 치료사"다. 뉴럴링크로 사람들의 꿈을 기록하고, 다음 날 밤 꿈이 이어지도록 연결한다. 끊긴 꿈을 치료하는 사람.


은지의 출퇴근 거리는 상당히 길다. 해운대에서 광안리까지. 해변도로로 편도 1시간.


하지만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 매일 보는 파도.


오늘 아침도 은지는 해변도로를 달렸다. 창밖으로 파도가 철썩철썩 쳤다.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당연하게.


은지는 파도를 보며 생각했다.


파도는 당연히 친다.

매일. 끊임없이.

만약 파도가 멈추면?

상상이 안 된다.

파도는... 그냥 쳐야 한다. 당연히.


은지는 센터에 도착했다. 오늘 첫 환자는 이준. 35세 남성. 5년째 꿈이 끊긴다.


[과학자의 노트]

꿈 연속성 기술에 대한 짧은 메모.

2125년, 뉴럴링크 기반 꿈 기록 기술 상용화.

작동 원리:
1. 수면 중 뇌파 기록
2. 꿈 내용을 시각/청각/감각 데이터로 변환
3. 다음 날 밤, REM 수면 진입 시 이전 꿈 데이터 재생
4. 뇌가 자연스럽게 꿈을 이어서 꿈

효과:
- 꿈이 소설처럼 이어짐
- 꿈속 세계가 일관성을 가짐
- 일부 사람들은 꿈에서 "제2의 삶"을 삶

부작용:
- 꿈 의존성: 꿈이 이어지지 않으면 불안
- 연속성 강박: 모든 것이 이어져야 한다는 집착

질문: 꿈은 이어져야 하는가? 끊겨도 되는가?

은지는 이준의 꿈 기록을 열었다.


[ 환자: 이준, 35세 ]

증상: 꿈 불연속성 증후군
지속 기간: 5년

패턴:
- 꿈을 꾼다
- 다음 날 밤, 완전히 다른 꿈
- 이전 꿈과 연결 없음
- 매일 리셋

시도한 치료:
- 뉴럴링크 재조정: 실패
- 꿈 데이터 강제 주입: 실패
- REM 수면 연장: 실패

환자 호소:
"꿈이 매일 끊겨요. 이어지지 않아요. 불안해요."


은지는 이준과 상담했다.


"이준 씨, 꿈이 이어지지 않으면 어떤 기분이 드세요?"


"답답해요. 어제 꿈에서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났는데, 오늘은 기억도 안 나고. 완전히 다른 꿈을 꿔요."


"그게 문제인가요?"


이준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문제죠. 꿈은 이어져야 해요."


"왜요?"


"...당연히 그래야죠. 다들 그러잖아요."


은지는 잠시 멈췄다.


"이준 씨, 꿈 연속성 기술이 나오기 전에는 모든 사람의 꿈이 끊겼어요. 매일 다른 꿈을 꿨죠."


"그건... 옛날 이야기잖아요. 지금은 이어지는 게 정상이에요."


"정상? 아니면 당연?"


이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은지는 상담을 마치고, 자리에 돌아와 생각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이준은 그렇게 말했다.

꿈은 이어져야 한다. 당연히.

하지만 10년 전에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이건 당연한 게 아니라... 습관?

아니면 강박?




퇴근길, 은지는 다시 해변도로를 달렸다.


파도가 쳤다. 철썩철썩. 규칙적으로.


은지는 파도를 보며 문득 생각했다.


만약 파도가 멈추면?

파도는 당연히 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그래야 하나?

파도가 안 치면 안 되나?

그냥... 습관적으로 친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은지는 차를 세웠다. 해변가에 내렸다.


파도를 가까이서 봤다. 밀려왔다가 빠진다. 반복.


당연하다.


아니, 당연한가?


은지는 자신의 삶을 떠올렸다.


출퇴근. 편도 1시간. 매일.


3년째.


이것도 당연한가?


매일 아침 일어난다. 샤워한다. 옷을 입는다. 차를 탄다. 해변도로를 달린다. 센터에 도착한다. 일한다. 퇴근한다. 집에 온다. 저녁을 먹는다. 잔다.


반복.


이것들은 당연한가?


그래야 하는 건가?


내 삶에서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들은 뭐지?

출퇴근? 당연한가?
매일 파도를 봐야 한다? 당연한가?
꿈 치료사로 일해야 한다? 당연한가?

생각해보니... 너무 많다.

거의 모든 게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은지는 집에 돌아와 자신의 꿈 기록을 열었다.


그녀도 뉴럴링크를 쓴다. 꿈이 이어진다.


최근 6개월 꿈 기록을 봤다.


[ 은지의 꿈 연속성 기록 ]

지난 180일:
- 연속일: 180일
- 끊김: 0회
- 연속률: 100%

꿈 내용:
- 해변가 작은 카페 운영
- 손님들과 대화
- 파도 소리를 들으며 커피 내림
- 평화로움

특이사항:
현실과 완전히 다른 삶
꿈에서는 치료사가 아님


은지는 기록을 보며 멈췄다.


6개월간 한 번도 안 끊겼다.


매일 밤, 꿈속에서 카페를 운영한다.


현실에서는 치료사. 꿈에서는 카페 주인.


어느 쪽이 진짜인가?


아니, 둘 다 진짜인가?


은지는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나는 꿈이 이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준을 치료하려 했다.

하지만... 꿈이 끊기는 게 문제인가?

아니면 이어지지 않으면 불안한 게 문제인가?

당연함에 대한 집착이 문제인가?


은지는 잠들었다.


그리고 꿈을 꿨다. 카페. 해변가. 파도 소리.


어제의 연속.


손님이 들어왔다. "커피 한 잔 주세요."


은지는 커피를 내렸다. 창밖으로 파도가 쳤다.


규칙적으로. 당연하게.


꿈속에서도 파도는 쳤다.




다음 날 아침, 은지는 다시 출근했다.


해변도로. 파도. 철썩철썩.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파도가... 약했다.


평소보다 훨씬. 잔잔했다.


은지는 차를 세웠다. 내려서 파도를 봤다.


밀려온다. 하지만 힘이 없다. 철썩이 아니라 쏴아.


부드럽다.


은지는 놀랐다.


파도가... 약하다.

당연히 철썩철썩 쳐야 하는데.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파도도... 변하는구나.


은지는 센터에 도착했다. 이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 어젯밤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무슨 일이요?"


"꿈이... 이어졌어요."


은지는 놀라서 기록을 확인했다.


[ 이준 꿈 기록 - 최근 ]

어제 밤:
- 연속일: 1일
- 내용: 그제 꿈의 연속

비고:
5년 만에 처음으로 이어짐
치료 없이 자연스럽게 연결됨


"축하드려요. 이준 씨."


"근데... 이상해요."


"뭐가요?"


"이어지니까... 부담스러워요. 내일도 이어져야 하잖아요. 계속."


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 씨, 질문 하나 할게요. 꿈은 꼭 이어져야 하나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누가 그렇게 정했나요?"


이준은 멈췄다.


"이준 씨, 꿈은 이어져도 되고, 끊겨도 돼요. 둘 다 괜찮아요."


"그럼... 제가 5년간 힘들어한 게..."


"당연함에 대한 집착이었을 수 있어요. 이어져야 한다는."


이준은 오래 생각했다.


"그럼 저는 뭘 치료받은 거죠?"


"끊김을 치료한 게 아니라... 당연함에서 벗어나는 연습이었을지도 모르죠."




퇴근길, 은지는 다시 해변도로를 달렸다.


파도는 여전히 잔잔했다.


철썩이 아니라 쏴아.


은지는 생각했다.


파도는 당연히 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조용하다.

그래도 괜찮다.

파도도 쉴 수 있다.

당연한 게 아니었구나.


은지는 집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 밤 꿈은 어떨까?


카페가 이어질까?


아니면 다른 꿈을 꿀까?


은지는 잠들기 전에, 뉴럴링크 설정을 열었다.


그리고 하나의 옵션을 봤다.


"꿈 연속성: ON / OFF"


은지는 손가락을 옵션 위에 올렸다.


6개월간 한 번도 끄지 않았다.


항상 ON.


당연히.


은지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OFF로 바꿨다.


오늘 밤은 끊겨도 괜찮다.


은지는 잠들었다.




아침, 은지는 깼다.


꿈을 꿨다. 하지만 어제와 다른 꿈.


카페가 아니었다. 산이었다. 높은 산. 눈 덮인 정상.


은지는 혼자 걸었다. 조용했다. 평화로웠다.


끊겼지만, 괜찮았다.


은지는 출근 준비를 했다. 차를 탔다. 해변도로를 달렸다.


파도는 다시 쳤다. 철썩철썩.


어제보다 강하게.


당연히? 아니다.


그냥 오늘은 그렇게 치는 것뿐.


내일은 또 다를 수 있다.


은지는 파도를 보며 생각했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들.

생각해보니 너무 많았다.

출퇴근은 당연히 해야 하고,
파도는 당연히 쳐야 하고,
꿈은 당연히 이어져야 하고.

하지만 정말 그래야 하나?

파도는 쉴 수 있다.
꿈은 끊길 수 있다.
출퇴근은... 안 해도 되는 날이 있을 수 있다.

당연한 건 없다.

그냥 계속되는 것들이 있을 뿐.

그리고 멈춰도 괜찮은 것들도 있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제 안다.

당연한 것은 없다.
선택이 있을 뿐이다.

계속할 것인가, 멈출 것인가.

그건 내가 정한다.


은지는 센터에 도착했다.


오늘도 환자들이 기다린다. 꿈이 끊긴 사람들.


은지는 예전처럼 치료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물을 것이다.


"꿈은 꼭 이어져야 하나요?"


"끊겨도 괜찮지 않나요?"


당연함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선택을 돌려줄 것이다.


은지는 첫 환자를 맞이했다.


창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파도가 쳤다. 철썩철썩.


오늘은.


내일은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글 · 잡학도서관 모따모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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