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많은 게 아니라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는 예전에
‘사건보다 무서운 건 내 해석이다’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사소한 일 앞에서 혼자 불안한 상상을 키우며
스스로를 힘들게 했던 이야기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유난히 예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브런치에 글을 쓰며 알게 되었다.
나처럼 스스로 불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불안을 상상하는 습관은
오랜 시간 내 성향으로 굳어졌다.
그래서 불안을 내려놓는 연습은 여전히 쉽지 않다.
최근에도 사소한 일들 앞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시뮬레이션을 먼저 떠올렸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예민함과 불안은
결함이 아니라 과한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주어진 일을 쉽게 넘기지 못하고
그 의미와 결과,
누군가에게 미칠 영향까지
한꺼번에 떠올리는 성향.
불안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불안이 밀려오기 전,
내 머릿속에는 늘 이런 질문들이 먼저 흐른다.
‘이게 제대로 안 되면 어쩌지.’
‘이 선택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만들까.’
‘혹시 누군가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 되지는 않을까.’
마음이 불안해서 생각이 많아지는 게 아니라
생각이 많아서 마음이 불안해지는 쪽에 가까웠다.
불안은 현실 그 자체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가능성을 앞서 그려보는
내 상상력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이런 상상을 하는 사람은
어쩌면 꽤 부지런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머릿속에 그린 장면을
글로 옮기고 정리하려는 사람들,
불안을 감추기보다 표현하려는 사람들이
글을 쓰게 되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불안한 생각을 바로 해결하려 들기보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이건 지금 처리할 생각인가,
아니면 기록만 할 생각인가.'
하나만 선택한 뒤
“지금은 여기까지만 책임진다”고
선명하게 선을 긋는다.
이건 포기가 아니라
지혜로운 분리다.
나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 감각은 삶을 망치기 위해 주어진 게 아니라
더 깊게 살기 위해 주어진 도구일지도 모른다.
나는 불안을 없애야 할 사람이 아니라
불안을 다룰 줄 알게 될 사람이다.
불안이 올라올 때마다
“또 이러네”라며
나를 혼내왔던 시간이 길었다.
하지만 돌아보니
진짜 힘들었던 건 불안 그 자체보다
불안을 부정해왔던 시간이었다.
이제 훈련의 방향을 바꾸려 한다.
불안을 없애는 연습이 아니라
불안이 올라올 때 나를 혼내지 않는 연습.
“아, 지금 내 감각이 작동하고 있구나.”
“지금은 다루는 연습 구간이구나.”
이 정도의 메타 인식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지나온 셈이다.
나는 이미 도구를 쓰고 있다.
글로 정리하고,
스스로를 관찰하고,
조급해하지 않겠다고 선택하는 것.
이건 성과의 문제가 아니라
숙련의 영역이다.
나는 고쳐야 할 사람이 아니라
조율되어 가는 사람이다.
앞으로도 답답한 날은 올 것이다.
속도가 느리다고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말해주려 한다.
나는 멈춘 게 아니라
이동 중이라고.
지금은 쓰고, 느끼고, 관찰하며
흔들리더라도 멈추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글이
불안을 혼자 견디고 있던 누군가에게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 사진출처(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