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숭아 서리의 밤 ―
우리 동네는 시골이고, 농촌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산과 들엔 먹을거리가 참 많았습니다. 김장철이 다가오기 전, 길가의 무밭에서 뽑아 올린 시원한 무수(무)는 우리들의 간식이었고, 늦은 밤 허기질 땐 남의 배추밭에서 배추 몇 포기쯤 뽑아 배추쌈을 해 먹기도 했습니다.
그런 정도는 무밭이나 배추밭 주인들도 ‘그러려니, 나도 어릴 땐 그랬어’ 하고 넘어가 주시던, 너그러웠던 시절이었지요.
하지만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그건 ‘서리’였습니다.
초여름엔 붓감재(감자) 캐러 가고, 한여름엔 수박이나 참외를 서리했지요.
산과 들에 먹을 것이 많지 않던 가을이나 겨울이 되면, 용감한 녀석들은 닭서리까지도 도모했습니다.
그런데요. 우리 중리동네 아이들에게만 있었던 아주 특별한 서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전남이형네 과수원 복숭아 서리.
어느 초여름 밤이었습니다.
복숭아 서리를 계획한 우리는 대여섯 명이 밀가루 포대를 두 개 챙겨 들고 전남이형네 과수원을 향해 나섰습니다. 과수원에 들어갈 때는 마치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나 표범이 사냥감에 접근하듯, 숨소리조차 죽이고, 발자국 소리 한 톨조차 아끼며 조심조심 다가갔습니다. 복숭아나무 아래서 익지도 않은 복숭아를 한창 따던 그때,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쉿, 소리 들었냐?” 모두가 동작을 멈추고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살금살금, 무언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 ‘전남이형이다!’ ‘들켰다!’ 형님 중 한 명이 짧게 외쳤습니다. “튀어!”
그 순간, 우리 모두 지상 최속의 스피드인 우사인 볼트의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두운 밭길을 가로질러, 이랑을 넘고 밭두렁을 넘어가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동네 쪽을 향해 정신없이 내달렸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달빛 아래로 어렴풋이 보이는 큼직하고 검은 실루엣—
맞습니다. 전남이형이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도망치다 보니 어느새 1km가 넘는 ‘땅넘샘’까지 와 있었고, 우리는 그제야 멈춰 서서 인원 점검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우리 동네 아이들보다 도망친 아이 수가 더 많은 겁니다. 알고 보니, 이웃 동네인 하리 동네의 명렬이랑 그 친구들이 뒤늦게 과수원에 복숭아 서리하러 왔다가 우리가 도망가는 소리에 같이 놀라서 덩달아 뛰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전남이형도, 그 시끌벅적한 도망 소리에 ‘도둑놈들’이 들켰다고 생각하고 도망가는구나 생각하고 우리를 뒤쫓아오다 지쳐서 포기했던 모양입니다.
우리는 동네 한 가운데 있는 소자형 집 앞에서야 겨우 멈춰 숨을 돌렸습니다. 내가 힘겹게 도망치며 들고 왔던, 복숭아가 반 자루나 가득 찬 밀가루 포대를 내려놓자, 곁에 있던 한 형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습니다. “야, 이걸 들고 뛰어온 거냐?” “이 멍청한 놈아! 잡히면 어쩌려고 이걸 들고 튀냐! 네가 잡히면 다 불어서 우리 모두 다 잡히는데, 서리하다 들켜서 도망갈 땐,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이 안 잡히는 게 상수다, 따라서 잡힐지 모르니 복숭아는 버리고 튀어야지!” 그러면서도, 그 형은 웃으며 차두를 열어 우리에게 복숭아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옷자락에 꺼끌한 복숭아 표면을 슥슥 문질러 털고, 다 익지 않아 아삭한 그 복숭아를 하나둘 씹어 먹었습니다. 그렇게 시고 떫고 달콤하던 맛—
정말이지, 세상 어떤 과일보다도 맛있게 느껴졌습니다.
그날 우리는 다행히 잡히지 않았지만, 가끔 전남이형에게 덜미를 잡힌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날이면, 전남이형은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그 친구들을 불렀다고 합니다. 기합을 조금 준 다음엔 퇴비를 나르게 하거나 밭에서 풀을 뽑게 했고, 마지막엔 땅에 떨어진 복숭아를 한 아름 줘서 먹고 가게 했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땐 어른들도 아이들의 짓을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받아주시던, 그런 따뜻한 시절이었습니다. 50년이나 더 지난 이야기지만, 그 밤의 달빛과 복숭아의 냄새, 달아나는 숨소리와 형들의 웃음소리가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지금은 새벽 1시입니다.
삶의 무게에 쌓인 스트레스를 술 한 잔으로 달래고 들어온 밤입니다.
문득, 부모님의 사랑 아래 아무 걱정 없이 살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
행복했던 그때를 떠올리다 보니…
가슴 한켠이 저려옵니다.
그날 함께했던 형님들, 잘 지내시지요?
보고 싶습니다.
정말요, 너무 많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