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 시험과 ‘빨간손’의 밤”
어렸을 적, 여름밤이면 도깨비 이야기가 일상의 대화처럼 오갔습니다. 그 시절, 우리에게 무서운 이야기는 무서우면서도 설레는 놀이였고, 누가 ‘무섬(겁)’을 덜 타느냐, 누가 진짜 ‘담 큰 놈’이냐는 골목 아이들 사이에서 최고의 관심거리였습니다.
중리초등학교 운동장은 해가 지고 별이 뜨면 모험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그날도 평소처럼 대장 형님들의 호출이 있었고, 우리는 하나둘 운동장으로 모였습니다. 운동장 한켠, 그네 옆 시멘트 스탠드에 줄줄이 앉아 있자 형님들이 슬쩍 귀신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합니다.
“이 국민학교 지을 때 말이야, 터를 파다가 엄청나게 큰 구렁이가 나왔는데,
공사하던 인부들이 그걸 잡아먹었다더라. 근데 그 구렁이가 한이 맺혀서 말이지, 이 학교는 소풍만 가면 꼭 비가 오는 거야.”
시작부터 분위기는 으스스해졌습니다.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형님들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어지는 화장실 괴담. “옛날에 어떤 선생님이 밤에 큰일을 보러 화장실에 앉았는데, 갑자기 아래에서 ‘파란손~ 주리~’ 하는 소리가 들렸대.” “놀라서 ‘아니!’ 했더니 이번엔 ‘노란손~ 주리~’” “또 ‘아니!’ 했는데... 마지막엔 ‘빨간손~ 주리~’ 하더래.”“그래서 선생님이 장난인가 싶어 ‘그래!’ 했더니, 진짜 빨간손이 변기 밑에서 스르륵 올라왔대!”
이야기가 끝나자, 아이들은 서로의 무릎을 껴안듯 바짝 붙었고, “진짜래… 세 번째 칸은 절대 가지 마라…” 하는 속삭임이 퍼졌습니다. 그러자 형님들이 슬쩍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겁쟁이 시험이다.” 당시 우리 초등학교는 두 개의 화장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운동장 왼쪽 끝, ‘딸각다리(계단)’ 위쪽에, 다른 하나는 선생님들이 거주하는 사택 근처, ‘땅넘’ 동네 끝자락에 외따로 떨어져 있었죠.
시험은 이랬습니다. 한 사람씩 ‘땅넘 화장실’까지 혼자 가서, 세 번째 칸 문을 열었다가 닫고 돌아오는 것. 길도 일부러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가운데 길로 가면 숙직실이 있어 덜 무서우니, 오른쪽으로 돌아 숙직실을 피해 가도록 했죠. 형님들의 치밀한 설계였습니다.
한 명, 한 명 시험을 치르듯 심장을 쥐고 출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경남이 형 차례, 그리고 마지막은… 바로 저였습니다.
그때 저는 초등학교 1학년, 골목에서 종화와 함께 제일 막내였습니다. 처음엔 나도 용감하게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중간쯤에 있는 교문을 지나자 심장이 벌렁거리고 밤마다 어르신들이 팽나무 아래서 들려주던 온갖 귀신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진짜 빨간손이 나를 낚아채면 어쩌지…” 입술이 바짝 말라붙고 다리가 후들거리더니, 결국 화장실 입구까지 가고도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땐 재래식 화장실이라 냄새도 심하고, 외진 곳에 있어서 혼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들어가지 않아도 모를 거야. 그냥 열었다고 하자...’ 스스로를 속이며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10미터쯤 돌아오는 순간, 어디선가 형님들이 우르르 튀어나오며 소리를 지릅니다.
“야~ 안 들어갔다~!” “겁쟁이다! 겁쟁이 박용상~” “우리 동네 겁많은 막내 등장~!” 한바탕 웃음과 놀림이 터졌습니다. 알고 보니, 그날은 특별히 나만 몰래 따라온 것이었습니다. 진짜 문을 여는지 몰래 확인하러 형님들이 숨죽이고 따라와 숨어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놀림을 당하는 순간에도 수치심보다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옆에 누군가 있구나…’ 혼자 있지 않다는 사실이 그 밤을 덜 무섭게 만들었습니다. 오히려 들켜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같은 날 시험을 본 종화는 귀신도, 도깨비도,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높은 나무도 척척 잘 타고, 작은 개구멍도 쏙쏙 잘 빠져나가고, 연이나 팽이 같은 건 손재주 하나로 뚝딱 만들어냈던 친구.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 골목의 진짜 히어로는 종화였던 것 같습니다. 20년 전쯤, 양평에 살던 종화를 마지막으로 보고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소식조차 모릅니다.
문득 그 얼굴이 그리워집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빨간손’을 무릅쓰고 세 번째 칸의 문을 당당히 여는 강심장으로 열심히 살고 있겠지요.
그 시절, 우리는 참 순수했고, 서툰 용기마저도 찬란했습니다. 겁쟁이도, 영웅도, 도깨비도, 빨간손도 모두 우리의 한 장면이 되어 가슴속 깊은 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 여름밤,
운동장 위로 쏟아지던 별빛과 형님들의 웃음소리,
그때의 공포와 안도, 그리고 종화의 담대한 뒷모습까지.
모든 것이 그립고,
갈 수만 있다면 꼭 한 번은 다시 한번 그 시절로 돌아가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