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리동네 우리만 아는 이야기 ①

― 골목대장과 그 시절의 우리 ―

by 전략가 박용상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종이 울리기 무섭게 우리는 책가방을 팽개치듯 던지고 운동장으로 달려나갔습니다. ‘세모놀이’, ‘네모놀이’, ‘닷간놀이’, ‘고기잡이’…

요즘 아이들에겐 낯설지 몰라도, 그땐 우리만의 놀이였고, 우리만의 우주였습니다.

충길 형네 마당, 감나무 그늘 아래는 구슬치기 경기장이었습니다. 손가락에 껴서 튕겨내던 반질반질한 유리구슬의 감촉은 지금도 손끝 어딘가에 살아 있는 듯합니다.

딱지도 있었습니다. 종이로 접은 딱지도 있었지만, 가게에서 파는 딱지는 더 귀했고, 더 치열했습니다. 문식이는 딱지를 유난히 많이 가지고 있었고, ‘삔 두비’, ‘물쭈잡기’ 같은 놀이에서는 늘 승자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잇따라 딱지를 잃은 문식이가 얼굴이 빨개지더니, 양은 도시락에 가득했던 딱지를 한꺼번에 모두 찍었다가 잘못 찍어 날려버리고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울던 장면—

그때 우리 집 마루, 그 울음소리, 그 기척이 아직도 마음 한편에 남아 있습니다.

해가 지면 골목은 다시 우리들의 세상이었습니다. 재봉이 형, 복근이 형이 이끄는 ‘도둑놈 마질’ 놀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마치 한 편의 의식 같았습니다.

절반은 도둑이 되어 숨고, 나머지는 술래가 되어 찾는 놀이. 숨을 수 있는 곳은 온 동네, 단 방 안만 제외. 왜냐고요? 자기 방에 들어가 잠들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외양간, 돼지우리, 남의 집 마루 밑과 지붕 위, 심지어 재래식 변소까지—

삼촌 세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숨을 곳의 명당을 줄줄이 꿰고 있었습니다.

한 시간쯤이면 다 찾을 수 있었고, 곧바로 도둑과 술래를 바꿔가며 밤이 깊도록 웃고 뛰며 놀았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어린 날의 여름을 통째로 살아냈습니다.

그러나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고 텔레비전이 생기면서 골목의 풍경은 달라졌습니다. 아버지의 큰방에 모여 TV를 보는 시간이 늘자, 밤놀이의 웃음소리는 점점 사라져 갔습니다. 그 변화의 기미를 우리는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건 골목의 종말이자, 어른이 되어가는 시작이었는지도요.

술을 마시게 될 무렵부터는 복근이 형네 집이 밤의 아지트가 되었습니다.

형의 부모님은 워낙 인자하신 분들이라, 아무리 떠들어도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명절 밤이면, 객지에서 돌아온 형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술을 한 잔씩 들이키며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다 보면, 그 밤은 어느새 어른이 되는 길목의 의식이 되어 있곤 했습니다.

웃음이 있었고, 우정이 있었고, 어색함을 품는 따뜻한 쉼표가 있었습니다.

기억납니다. 국민학교 시절, 운동장에서 골목대장 형들이 우리를 한 명씩 불러 세워 ‘좋아하는 여학생’을 말하게 하던 그 밤.

초등학교 4학년이던 우리에게 중학생이던 형들의 질문은 사뭇 어른스러웠습니다. 형들이 사춘기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겁박처럼 쏟아지던 물음에, 결국 저는 “하리 송미”라 대답했습니다. 명호, 종화도 송미를 말했고, 문식이는 순실이를 말했던 것 같습니다. 예쁘고 공부도 잘하던 아이였죠.

모두 한 명씩 이름을 말했지만, 정기 형과 기홍 형, 단 두 사람만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결국 혼이 났지만, 왠지 모를 존경심 같은 것이 들기도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저 형들은 뭐가 다르구나 생각했지요.

그날 밤 노래 시간, 저는 유일하게 아는 노래인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불렀습니다. 당시 아는 유행가가 없었기에 노래를 시키면 항상 그 노래만 불렀습니다.

“노래 좀 더 배워라”며 대장 형은 웃으며 쫑꾸를 주었고, 그 웃음이 이상하게 따뜻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춘길 형의 절권도 시범도 빠질 수 없었습니다. 태권도의 기마자세로 하는 지르기인데, 절도 있게 지르는 것이 아니라 기마자세에서 개다리춤처럼 다리를 흐물흐물하며 지르는 자세였습니다. 배삼용 씨의 개다리춤에 태권도 기마자세 지르기를 혼합한 형태였지요. 우리는 옆에서 따라 하며 한참을 웃었습니다.

우리 동네는 전남 해남군 화원면, 차로는 멀지만 배로 더 가까운 바닷마을입니다. 목포에서 배를 타고 별암리를 거쳐 화원 선창까지 두 시간. 낙지와 망둥어를 안주 삼아 갑판에서 마시던 소주 한 잔의 맛, 그리고 우리 대장 형들이 만든 노래—그건 마치 바다 위에서 태어난 노래였습니다.

명성호 왔다 갔다, 별암리 항구 제일 부두,

점수도 마도로스, 선장이야 말도 우습더라,

선장은 운전 틀고, 기관장 기계를 보고,

손님들은 잔소리 까며, 사무장 선표 받는다~

이 노래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우리 중리동네 사람입니다.

햇살 아래 반짝이던 땀, 감나무 아래의 웃음소리, 무릎의 상처, 밤의 속삭임까지 모두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건 단지 ‘추억’이 아니라, 그 시절 감정의 결정체였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놀이, 잊힌 말투, 지워진 골목 이름들. 하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어릴 적 그 골목, 그 골목대장, 그리고 우리를 품어주던 마을은 지금의 나를 만든 첫 번째 학교이자, 영원한 고향입니다.

혹시 당신도 잊고 있던 당신만의 골목이 있지는 않으신가요?

그 골목엔, 당신이 잃어버린 그 시절이 아직도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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