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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을 아는 사슴 Jul 26. 2023

자력구제기

1. 인생은 메이플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늘 컴퓨터를 옆에 끼고 살았다. 다른 집과 다르게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게임을 하고 있어도 부모님이 절대 뭐라고 하지 않았다. 큰 데스크톱이 거실에 있었고 방학 때면 그 컴퓨터 책상에서 시리얼을 부셔먹으며 하루에 꼬박 8시간 동안 게임을 했다. 당연히 그곳이 내 자리인 듯이. 마치 정해진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회사원같이. 기억이 살아있던 순간부터 나는 언제나 현실 세계와 더불어 게임 세상에서도 살고 있었다. 내가 주로 하던 게임은 RPG 게임. role-playing game의 약자로, 캐릭터의 성격을 형성하고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게임의 형태라고 방금 네이버에 검색하고 그 정의를 알았다. 중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당당히 큰 화면에서 소리를 빵빵하게 들으며 게임을 하러 가고 싶으니 우선 3천 원만 달라고 할머니에게 요구했으며, 어른이 된 후 '새피'(새벽 피시방)는 일상이었다. 보통 연인 사이에서 여자가 남자를 찾으러 pc방을 돌아다닌다는 말을 들었는데, 난 늘 남자 친구가 나를 찾으러 pc방에 왔다. 친구들도 애인도 언니도 그 누구도, 카페도 도서관도 어디도 아닌 pc방에서 늘 나를 찾아냈다.


그렇게 게임에 미쳐 살았다면 과연 게임이 나에게 가져다준 것과 가지고 간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우선 게임은 나에게 천부적인 타자 실력을 주었다. 어차피 내가 하는 게임도 모니터 건너편의 사람과 하는 것이다. 롤 플레잉 게임을 하려면 수많은 캐릭터와의 채팅이 중요한데, 내가 필요한 아이템을 얻을 때나 어려운 퀘스트를 깨기 위해 파티원을 구하는 것도 모두 채팅 스피드가 생명이다. 이 덕분에 난 지금도 타자가 700 타는 나오고 컨디션 좋으면 800타까지 거뜬하다. 이 능력은 이후에 리포트를 쓰거나 나아가 자소서를 쓰는데 아주 큰 도움을 주었다. 뭐 더 넓게 생각하면 지금 병원에서 일할 때도 간호기록을 후루루룩 누구보다 빨리 써내 린다.


그리고 게임은 나에게 시력을 앗아갔다. 안경을 아마 7살부터 썼던 것 같다. 컴퓨터를 만지기 시작한 것도 대략 그즈음이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히 하나씩을 주고받은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컴퓨터 게임 때문(!)이라기엔 뭐 시력은 유전이라는 말도 있고, 어렸을 땐 눈 좋은 애들이 안경을 쓰고 싶어서 티비를 일부러 들여다보는 일도 있었고, 안경 쓴 내가 귀여워 보일 때도 있으니 그리 억울하지 않다. 나에겐 게임을 하며 얻은 것이 더 많다. 가끔은 부담스러운 두 눈의 선명함쯤은 그때로 돌아가도 내어준다고 말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구구절절 나의 게임 사랑을 내보였다. 며칠 전에 서울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스무 살, 스물한 살 즈음에 만난 대학 동기들인데 이제는 모두 어디 어디 소속의 무슨 무슨 직함을 단 누구누구가 되어있었다. 회사 생활 경력은 11개월, 7개월, 1개월. 그렇다 우리는 다 사회 초년생이다. 아직은 억울하고 서러운 일이 많다. 일이 주는 기쁨과 약간의 재미와 그리고 심하게 간헐적인 뿌듯함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장점은 희미했고 단점은 선명하다.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피자를 뜯어먹으며 인생은 뭘까. 인생은 뭘까. 고민했다. 예전과 다르게 대화 사이에 공백도 많았지만 누구도 그 공백을 깨려 들지는 않았다. 각자의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다 처음 살아보는 거라서 인생이 뭔지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제대로 말할 순 없었지만 뭐라도 말하고는 싶었다.



그때 내가 키워낸 수많은 캐릭터들을 떠올렸다. 내가 지난 세월 동안 메이플 스토리에서 하루에 8시간을 꼬박꼬박 투자하며 만들어낸 수많은 인생들. 어떤 애는 마법사가 되었고, 어떤 애는 해적이 되었고, 어떤 애는 눈이 부시는 금발머리를 해줬고, 어떤 애는 태어난 그대로의 빡빡머리를 그대로 냅뒀다. "있잖아.. 인생은 메이플이야.. "


"메이플도 처음 level 1일 때는 진짜 무슨 런닝 쪼가리랑 맨발로 시작해. 그러다가 작은 달팽이부터 잡다가 차근차근 '전직'이라는 걸 준비해. 그건 내가 어떤 직업이 될지 고르는 건데, 그 전직에 따라 만나는 사람들도 달라지고 내가 가진 무기랑 기술도 달라져. 나는 활을 쏘는 궁수가 될 수도 있고, 표창 날리는 도적이 될 수도 있고 그런 거지. 근데 그거 한 번 고른다고 끝이 아니다? 레벨업 할 때마다 내가 계속 내 경험치를 어떤 곳에 집중할지 정하는 거야. 나의 강점을 민첩성으로 만들 건지, 정확성으로 만들 건지. 그 뒤로도 2차 전직, 3차 전직 쭉쭉 있어서 내 캐릭터만의 특화된 부분을 만들어 나갈 수가 있어."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나보다 10배는 큰 몬스터들도 잡게 돼. 나는 손만 까딱했는데 내 스킬 한 번에 걔네는 와당 탕탕 무너지는 거야. 그럼 난 더 성장하고, 더 어려운 스킬을 쓸 수 있게 되고, 더 강력한 무기를 얻게 되는 거지."


"근데 그냥 그렇게 시간만 투자하면 되는 거 아니고 더 높은 레벨로 올라가려면 그 속에서의 친구들도 진짜 중요해. 걔네랑 같은 파티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도 엄청 도움을 받을 때도 있거든. 그걸 쩔 받는다고 했는데, 난 아무것도 안 해도 친구들이 날 먹여 살릴 수도 있어. 서러운 일도 많은데, 진짜 어려운 퀘스트 몇 날 며칠 개고생 해서 깼는데 보상으로는 내가 필요하지도 않은 아이템 하나 띡- 주거나,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으로 해결하는 경우도 있어. 그리고 사람들끼리 거래하는데 사기는 또 얼마나 많게. 그거 때문에 현생 망한 애들도 많을걸. 돈거래할 때는 조심 또 조심, 그리고 주변 시세도 잘 알고 있어야 돼."


"거기서도 예쁜 애들은 예쁜 애들대로 엄청 많고, 나보다 쎄고 잘 나가는 애들은 또 엄청 많아. 근데 난 내가 만들어 낸 캐릭터에 집중하면서 게임하는 거지 뭐 별 수 있나. 내가 만든 얘, 꿋꿋하게 얘가 더 좋은 아이템 장착하고 레벨 업하게 하는 거지."


혼자서 열심히 열변을 토했다. 유머는 이 이야기를 듣던 내 친구들은 메이플에 대해 잘 모르는 애들이다.

내 친구들의 이해도와 상관없이 열변을 토하고 나니까 갑자기 인생이 명확해졌다. 나는 이미 수 십 개의 인생을 만들어 본 경험자구나. 발가벗고 태어나서 온갖 휘황찬란한 갑옷과 왕관까지 써 본 사람이구나. 난 몇 번이고 태어났구나


그러고는 내 삶에 있는 나만의 역경과 고난이 약간 가벼워지면서 게임처럼 여겨졌다.

아 얘가 또 나 시험하네?

그치만 이것도 퀘스트다. 나는 알고 있다.

레벨 업 하기 위한 경험치를 모으는 발판이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조금은 삶을 우습게 여겼으면 좋겠다. 너무 심각해져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조금 헐렁하게 느슨하게 살아도 좋을 것 같다. 우린 그냥 게임 중인 거다. 뭐든 느리더라도 계속하면 레벨 업을 하긴 한다. 속도는 상관없이 방향이 중요하니까. 맞는 방향에만 서 있으면 된다. 사이버 세상에서도 버그 써서 빨리 레벨 업하는 애가 있는 거고, 나처럼 지긋하게 시간 투자해서 레벨 업 하는 애도 있는 거다.



그러니까.. 인생은 메이플!


https://www.youtube.com/watch?v=Dkfo908NN_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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