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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썸 Feb 09. 2022

존재를 긍정하기

호야

내 삶에 식물이라니. 코로나로 시작된 예상치 않은 삶의 전개로 인해 나는 식물 앞에서 덧없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식물들은 태어난 원산지에 따라 햇빛과 온도, 물의 양 등 좋아하는 환경이 다르고 생김새도 제각각이다. 그래도 어느 하나 옆 친구를 곁눈질하거나 조급해하지 않았다. 자기만의 시계를 품고 있듯이 자기만의 속도로 자랐다. 자기가 내야 할 모양의 잎을 내고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를 뻗으며, 움을 띄웠다. 나는 적절한 환경만 갖추어 주면 되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식물들을 바라보니 '자연스럽게 자란다는 것'이 존재가 존재답게 자라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자라고 있는 다른 두 생명체의 성장도 저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리 내 뱃속에서 나왔지만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제 속성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또는 저렇게 컸으면 좋겠다고 부모 욕심을 내는 것보다 아이들의 본성대로 잘 자라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보다 덜 흔들리고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긍정하는 것’과 같았다.




큰아이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것을 기억한다. “아… 이렇게 비 오던 날 기타 가방 메고 레슨 가던 거 생각난다. 그때 진짜 기타 치기 싫었는데." 순간, 뜨끔했다. 토요일에 쉬려고 하는 아이를 기어코 기타 가방을 들려서 밖으로 내몰았을 내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아들은 중 2까지 개인 레슨을 받았던 피아노도 지금은 근처에도 안 간다. 잔소리를 들어가며 꾸역꾸역 연습하는 걸 보면서도 아들의 그런 모습을 부정하고 언젠간 재미를 붙일 때가 오겠지, 피아노가 아들의 인생을 풍요롭게 할 거라고 믿었었다. 실상은 ‘피아노 치는 아들’을 갖고 싶었던 허상에 빠진 엄마였을 뿐이다.


큰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순하고 고분고분했다. 걷기 시작할 때부터 어린이집을 데리고 다녔는데 출근하는 바쁜 아침에도 내 속을 태웠던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내내 수학 문제집을 풀리고 엄마표 영어로 공부시키면서도 아이가 내 뜻대로 따라 주는 것을 힘 안 들이고 쉽게 키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쉽게 키웠다'는 말이 좋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부모의 뜻대로 자란 아이는 자신의 의사를 대답할 여지가 적었을 것이고, '내가 키운 방식이 옳았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성장할 기회를 놓쳤을지도 모른다. 온순하게 부모 말을 따르던 아이도 언젠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싶을 때가 온다. 그때까지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느슨해야 한다. 너무 타이트하면 끊어지기 쉽다.  


작년 가을 큰아이와 재래시장을 지나다가 꽃집 앞에서 발이 멈추었다. 걸음이 쉽게 떼어지지 않아 한참을 구경하고 있는데, 꽃집 아주머니가 이제는 고등학생이 된 아들애한테 말씀하셨다. “너는 엄마가 이런 취미를 가지신 게 얼마나 행운인지 모르지? 엄마가 너만 본다고 생각해 봐.” 아들애가 씩 웃었다. 



*위 사진은 호야. 잎이 두껍고 덩굴처럼 가지를 뻗는다. 생명력이 강해 잘 자란다. 재작년 봄에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 모습이다. 그 새 몰라보게 자랐다. 사진을 찍으면서도 얘가 걔 맞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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