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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썸 Feb 26. 2022

불 끄라는 말


어제 아침, 나보다 먼저 일어난 딸이 부스스 거실로 나갔다. 부엌 불이 켜져 있었던지 한마디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유, 아빠는... 썼으면 불을 꺼야지.” 일찍 일어난 남편이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고 거실 소파테이블에서 재택근무 준비를 하고 있을 터였다. 듣고 있던 남편도 가만있지 않고 딸에게 한 방 먹였다. “아니, 너는 어떻게 엄마랑 똑같은 소리를 하냐? 내가 너한테까지 잔소리를 듣고 살아야 되겠니.” 불 끄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저렇게 발끈 하나 싶다가 딸이 한 말이 평소에 내가 하는 말이랑 똑같아서 쓴웃음이 났다. 아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딸이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하고 있구나. 


안 쓰는 전기 스위치를 끄라는 건 누가 봐도 분명 옳은 소리다. 그런데 그 순간 무엇이 남편의 심경을 거스르게 했을까. 내가 생각한 결론은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듣는 사람의 상황에선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을 하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듣는 사람이 될 수 없다. 남편 입장에서 보면 막 잠에서 깬 딸이나 아내가 ‘굿모닝’도 아니고 ‘불 안 껐네’라는 말로 아침을 시작하면 싫을 것 같다. 게다가 지금 막 일을 시작하려는 참이라면? 게다가 그런 말을 (아내한테) 들은 게 다반사라면?


어쩌면 나는 부엌에 훤히 켜진 불보다 거실에 있는 남편을 먼저 보는 것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말은 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는 말이다.)






일 년에 딱 두 번 파마를 하러 가는 미용실 남자 사장님은 혼자 남매를 키우신다. 중학생인 큰딸이 한참 예민해서 내가 가면 이것저것 물어보곤 하시는데 이제 5학년이 되는 딸이 아빠한테 불 끄라고 잔소리했다가 도리어 한 소리 들은 이야기를 했더니 막 웃으셨다.


“안 쓰는 불을 끄라는 건 분명 옳은 소리지만 남편한텐 잔소리로 들렸나 봐요.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소리라고 생각해서 말해도 듣는 사람한텐 잔소리가 되는 것 같아요.” 내 말을 듣더니 사장님은 곰곰이 생각하시는 눈치셨다. “그런데 집에 가서 아이를 보면 말을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럴 땐 어떻게 하죠.” 하셨다. “음... 안 하셔야죠. 웬만해선 하지 마세요. 내가 생각해서 옳은 말이라도 아이한텐 잔소리로 들리더라고요. 뭐가 옳은지 아이들도 다 알아요.”


아이 키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나도 겪는 일이라 뭐라도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었다. 실은 저도 말을 아끼는 엄마가 눈물 나게 되고 싶은데 잘 안된답니다. 듣고 계시던 사장님은 “아... 어렵네요.” 하셨다.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 자랄 때도 생각해 보면 부모님 잔소리가 우리를 변화시키진 못했던 것 같아요.” 고개를 끄덕이신 사장님, 머리를 끝내고 가는 길에 헤어 에센스를 선물이라며 찔러 주셔서 아래층 과일가게에서 천혜향 한 봉지를 사다 드리고 왔다.


짧은 몇 마디 대화가 부녀지간에 좋은 영향력을 미쳤으면 좋겠다. 딸이 하는 행동보다 딸의 존재가 먼저 보이기를, 그래서 아버지의 마음이 평온하기를 기도했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을 공기처럼 마시며 무럭무럭 자란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할 말을 고르는 것보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내가 말 많은 엄마보다 글 쓰는 엄마가 되려고 마음먹는 첫 번째 이유다. 글을 쓰는 건 나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머리를 하고 집에 와 저녁을 먹으면서 오늘 아침에 불 끄라는 말 들은 것과 미용실 사장님하고 나눈 말을 이야기했다. 옆에서 밥을 먹는 딸아이한테 "너 아침부터 아빠한테 혼나서 기분 안 좋았지? 나와서 보니 아이패드 하면서 조용히 쭈그러져 있더라." 하니, 딸아이도 남편도 전혀 기분 나쁜 상황이 아니었다고 발뺌해서 괜히 나만 뻘쭘해졌다. 하지 않아도 될 말들에 대한 대화가 오고 간 끝에 남편이 조용히 한마디 했다. 


"그러니까 소리인 거야." 





*위 사진은 지난주에 남양주 수종사 경내에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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