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 산문 <삶은 도서관>을 읽고.
올해는 유난히 가을단풍이 아름답다. 길 가의 은행나무 샛노란 빛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찬란하다. 우리 집 앞마당의 공작단풍은 열두 폭 붉은 치마를 펼친 듯 마음을 단숨에 훔쳐간다. 가을이 더 늦게 찾아온 탓일까. 더디 온 계절을 기다리던 마음이 단풍잎마다 스며든 듯하다. 어떤 빛깔로 태어날지 설레며 기다리던 그 마음이, 올가을 유독 짙게 배어 있다.
인자 산문, 『삶은 도서관』은 그렇게, 유난히 아름다운 가을단풍 시절에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고운 분홍빛으로, 봄날 벚꽃의 꽃잎처럼 아름답고 고운 모습이었다.
어쩜 이렇게 상징적일까. 인자 작가는 인생시계로 보자면 가을의 시절을 맞이했다. 봄 여름 참으로 잘 살아왔기에 아마 고운 단풍으로 물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봄꽃을 기어이 피워냈다. 고운 벚꽃으로.
작가의 책을 읽으면 어쩌면 이렇게 딱 안성맞춤인 표지색을 입혔을까 싶다.
책을 펼치면 그런 표지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위트 있고 생동감 넘치면서, 일상의 따뜻함과 진솔함이 오롯이 녹아 있다. 거창하지 않다. 비현실적이지도 않다. 우리가 오늘 겪었을지도 모를 ‘바로 그 이야기들’이 작가의 손끝을 지나 조물조물 다듬어져, 마치 손만두 빚듯 먹음직스럽게 차려진다.
우리는 모두 공간에 머문다. 대개는 일상적으로 집과 일터가 가장 우리가 오래도록 머무는 공간이 될 것이다. 운명이란 있는 것인가 보다. 결국 타고난 글 꾼 인자 작가는 중년이 되어 마치 자신에게 꼭 맞는 옷을 맞춰 입듯이 천지가 책으로 둘러싸인 도서관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어쩌면 오랜 세월 애써 외면하듯 글쓰기와 떨어져 있었지만 ‘운명의 끌어당김’은 인자 작가를 다시 자신의 세계로 들어가게 했다. 그 수많은 책들의 들숨 날숨에 작가는 결국 다시 쓸 수밖에 없었으리라.
도서관은 작가에게 유쾌하다. 그녀의 눈과 귀에 비친 도서관은 절대 조용하지 않다. 사람들의 이야기, 책의 이야기, 삶의 이야기로 늘 소란스럽다. 잔잔한 미소와 폭소와 먹먹함이 하루에도 몇 번씩 뒤섞이며, 도서관은 작가에게 삶의 축소판이자 끝없는 글감의 보고가 되었다. 다시 읽는 기쁨, 쓰는 기쁨,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기쁨을 선물한 공간.
이 책은 그렇게 유쾌하고 따뜻하다.
1부 웃음의 서가
퇴화하는 것은 청력만이 아니다. 기억력도, 순발력도 예전 같지 않다. 생각해 보면 퇴화하지 않은 유일한 것은 마음뿐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보청기를 끼는 그날까지. 나는 ‘마음의 소리’라는 보조 배터리를 완벽히 가동해 볼 생각이다. -<‘젓가락 살인’은 우리 도서관에 없습니다> 중 일부발췌. P.18
2부 인생의 서가
봉합의 달인 닥터 허가 남긴 깊은 치유의 여운처럼, 우리는 오늘도 책이 입은 상처와 흉터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가장 따뜻한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되고 있다. 이 연결이야말로 도서관에서 대일같이 펼쳐지는 가장 본질적인 치유 행위이자 다정한 의식이다. - <책 봉합의 달인, 응급 닥터 허> 중 일부 발췌. P.42
3부 서가의 안쪽
언제나 완벽한 추천일 수는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이라면, 조용히 북카트 위에 내려놓으면 그만이다. 반납뿐 아니라 ‘반품’도 언제든 환영한다. 우리는 당신의 취향을 존중하고, 그 여정을 응원하는 도서관의 대출 상담 가니까.
-<우리는 대출 상담가> 중 일부발췌. P.143
4부 추억의 서가
이 샛노란 파일의 주인도, 어쩌면 나처럼 당황스러운 실수가 빚어낸, 웃음 나는 청춘의 한 페이지를 간직하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누군가 잃어버린 물건이 아니라, 내가 잃어버렸던 추억 하나를 되찾은 기분으로 분실물 보관함의 문을 닫았다. -<클리어 파일 실종사건> 중 일부발췌. P.208
5부 꿈의 서가
인자 작가는 나와 삼십년지기 친구이다. 우리는 같은 학과 동기이다. 우리의 진한 우정의 시작. 그 상징적인 책이었던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이번 인자 작가의 책은 첫 시작부터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해 주었다. 중간중간에는 큰소리로 폭소를 터트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나는, 5부 꿈의 서가를 읽다가 <여전히 우리의 생은 『생의 한가운데』 있다.>에 나오는 우리의 이야기에 그만 눈물이 왈칵 솟았다.
낡은 책 한 권이 반납되었다. 『생의 한가운데』.
‘반갑다 친구야.’ 나는 낡은 책의 표지를 어루만지며 속으로 외쳤다. 이 책은 30년 전 내 친구가 읽었던 책이자, 내 청춘의 한 페이지를 상징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방금 읽은 책 제목도 가물가물한 판국에 그 옛날 친구가 읽은 책을, 기억하는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잠시 생의 시계를 내 청춘의 한가운데로 돌리려 한다. P. 223.
스무 살의 내가 이해하기에는 니나의 생은 너무나 복잡하고 뜨거웠다. 읽고 싶었으나, 끝내 읽히지 않던 책. 하지만 이제는 다시 읽을 수 있으리라. 여전히 우리는, 생이 끝나는 그날까지도, 저마다의 생 한가운데를 헤매고 있을 테니까. P.226 - <여전히 우리의 생은 『생의 한가운데』 있다> 중 일부 발췌.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의 친구이자, 인자 작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우리는 여전히 '생의 한가운데' 있으며 그리고 이제 본격적인 인자 작가로서의 삶의 시계가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나의 친구 인자 작가의 그 발걸음을 힘차게 응원합니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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