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 세탁물을 건조기로 옮겨놓고 나가야지'라는 생각이 번쩍 들면서 세탁실로 급히 방향을 틀었다.
악! 장식장 모서리에 정강이를 정통으로 부딪혔다.
이미 출근가방은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고, 텀블러가 데구루루 주방 바닥을 구른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순간 눈앞에 작은 별들이 반짝, 귓가에는 말벌소리가 윙윙!
나는 양손으로 내 불쌍한 오른쪽 정강이를 부여잡고 웅크리고 있다.
“아! 아! 아!”
순간 막힌 숨을 토해내듯 짧게 세 번 외쳤다. 그리고 1초 2초 3초… 막혔던 숨길도 트인 듯 휴~~ , 정강이의 고통도 서서히 농도가 옅어지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는 잠시 그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나는 평정심을 되찾고 정강이를 살펴보았다. 벌써 검푸른 멍이 슬며시 자리를 잡는다. 고통이 지나가니, 흔적은 봐줄 만하다. 저만치 굴러가버린 텀블러를 다시 가방에 챙겨 넣고 나가려다가,
아차차 건조기! 건조기에 빨래를 넣고 플레이버튼을 꾹 누른다. 위이잉 건조기가 양쪽으로 왔다 갔다 원통 돌리기 준비운동을 몇 번 하더니 신나게 돌아간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현관을 나선다. 정강이의 푸른 멍을 매단 채로.
정강이의 멍은 한동안 짙게 남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멍자욱도 서서히 흐려지고 어느 순간에는 멍이 그 자리에 있었나 싶게 사라질 것이다.
냉동실을 열다가 꽝꽝 얼린 떡덩어리가 내 엄지발톱에 내리 꽂혔을 때도
침대 밑으로 굴러간 로션 뚜껑을 꺼내다가 침대장식봉에 정수리를 강타당했을 때도
채칼로 당근을 신나게 썰다가 쓱!(순간, 그 장면이 떠올라서 소름).
그때마다 나는 ‘아!아! 아!’ 숨을 토해내 듯 소리를 외쳤다. 그 순간의 고통이 좀 줄어드는 것 같다.
나만의 고통경감요법!
순간 예상치 못했던 이런 고통이 생기면 한 세 번 정도 아! 소리를 내면 고통이 줄어들더라. 마치 고통의 뜨거운 증기가 뿌뿌뿌 연기를 내며 빠져나가는 것 같다.
예상치 못했던 고통의 일격을 당할 때가 어디 신체만 있을까. 우리의 마음도 예상치 못한 일격으로 ‘눈앞이 깜깜하고 별이 반짝’ 보일만큼의 고통이 관통할 수 있다. 그럴 때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자신만의 요법을 준비하고 있다면 좀 안심이다. 그것이 독서일수도, 음악일 수도, 운동일 수도, 등산일 수도, 친구와의 수다일 수도,여행일 수도,쇼핑일 수도,청소일 수도 있다.
물론 그 요법의 효과가 크고 작을 수 있지만(아예 통하지 않을 수 도 있지만) 대부분은 효과가 좋다 싶은 것이 바로 ‘나만의 고통경감요법’이 될 것이다. 일종의 보상원리이다. 이것이 안되면 저것으로 보상받아서 안 되는 이것에 대한 힘듦을 줄여주는 원리.
순간 맞닥뜨린 고통의 증기를 조금이라도 빼낼 수 있는 보상방법을 찾아내는 것. 물론 당연히 건강한 보상을 선택해야겠다. 건강한 보상심리에서 비롯된 것은 약이 되지만, 왜곡된 보상심리에서 비롯된 것은 독이 되어 더 큰 고통의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