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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물구나무서기 2. 아침 걷기, 그 틈으로 바람이

# 틈과 틈 사이 # 바람길 열기

by 뽀득여사

해가 뜨거나 달이 뜨거나 숨 막히게 더웠던 이번 여름.

봄날에 걷던 여유도 한 여름 더위 속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헉헉대는 뜨거운 숨결을 에어컨 바람 속에 날리며 ‘더위야 가거라 훠어이 훠어이!’. 뜨거운 내 발은 여름 내내 게으름을 피웠다.


길었던 이번 여름이 이제 슬슬 봇짐을 싼다. 다음 손님 오기 전에 방을 빼야 한다며.


그래도 한낮의 해는 아직 미련을 못 버렸다. 아직도 ‘나는야 여름 태양’이라며 열을 내고 있지만 아침저녁은 낮보다는 점잖다. 자연의 순리는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며 계절신발을 바꿔 신는다. 여름 내내 게을렀던 내 두 발도 슬슬 기지개를 켠다.



오랜만에 아침 걷기를 한다.

호수공원으로 가는 방향의 도로변 오솔길을 걷는다. 몇 달 만이라서인지 주변 전경이 조금은 생경하다. 오솔길에 드리운 나무그늘이 막 떠오르는 해를 가려준다. 한 동안 게을렀던 내 발도 다시 기운을 낸다.


이틀 전 공기와 확연히 다르다. 느리지 않은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아가니 조금씩 바람도 나를 따라온다.


꼭 쥐었던 손을 느슨하게 풀어본다.

꼭 붙였던 팔도 내 몸에서 느슨하게 풀어본다.

뒤꿈치 닿는 대로 편하게 땅을 디딘다.

머리를 살살 흔들어보니 뒷목덜미에 얹혀 있던 머리칼이 좌우로 흩날린다.

맨살 등에 착 붙던 얇은 파랑 티셔츠도 벙실벙실 나풀댄다.

내 기분도 너울댄다.


힘주지 않고 걸으니 ‘틈’이 생긴다.

손가락 사이 틈, 겨드랑이와 몸통 사이의 틈, 뒷목덜미와 머리카락들의 틈, 무릎과 무릎사이의 틈, 맨살과 옷의 틈…. 틈 사이로 바람길 트이고, 맑고 시원한 바람이 지나간다.


틈을 생각하며 걷는다.

틈이 있는 나무 뒤에 틈 없는 나무가 있어 '찰칵'




생각 물구나무, ‘틈’에 대하여!


‘틈이 생긴다’는 대개는 사이가 멀어진다, 관계가 틀어진다 등 그다지 좋은 비유로 쓰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생각 물구나무서기로 새로이 ‘틈’을 바라보자!


생각과 생각 사이의 틈.

시선과 시선 사이의 틈.

호흡과 호흡 사이의 틈.

말과 말 사이의 틈.

너와 나 관계 사이의 틈.

감정과 감정 사이의 틈.


틈이 있으면

그 틈 사이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오늘 아침 걷기에서의 바람처럼.


생각과 생각 사이의 틈이 있으면,

생각이 지나치게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생각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오류에서 나를 건져주니 좋다.


시선과 시선 사이의 틈이 있으면,

눈길 닿는 것에 마구 이끌려 내 갈길을 망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게, 내가 정한 길을 되새길 수 있으니 좋다.


호흡과 호흡 사이의 틈이 있으면,

들이쉬고내쉬고들이쉬고내쉬고내쉬고들이쉬고 헉헉! 호흡순서 엉켜서 과호흡으로 기절하지 않고 정신 차리고 있을 수 있으니 좋다.


말과 말 사이의 틈이 있으면,

입은 내 입이로되 나의 머릿속을 거치지 않아서 '말인지 소인지' 모를 것들을 내뱉지 않을 수 있으니 좋다.


너와 나의 관계 사이의 틈이 있으면,

관계에 전혀 틈이 없다면 샴쌍둥이도 아니고 다중인격체도 아니고 '내가 나인지 네가 너인지' 분간이 안되어 낭패인데, 틈을 내면 오롯한 네가 잘 보이니 좋다.


감정과 감정 사이의 틈이 있으면,

빨간 감정 노란 감정 파란 감정 모든 감정 다 섞이면 뭐가 뭔지 모르는 검은색이 될 터인데, 감정과 감정의 틈으로 분명한 경계 지어주니 내 감정 잘 들여다볼 수 있으니 좋다.



생각과 생각 사이로

시선과 시선 사이로

호흡과 호흡 사이로

말과 말 사이로

너와 나 사이로

감정과 감정 사이로


오늘 아침산책의 바람 같은 것이 지나갈 수 있도록 틈을 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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