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그리고, 아버지의 삶>>
할아버지의 중매로 산너머 이웃마을 엄마랑 백년가약을 맺었다.
알콩달콩 신혼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의 트라우마를 모르고 결혼한 엄마는 무서웠다 한다.
아버지의 머릿속 두려움은 밤이면 더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자다가도 깜짝 놀라는 일이 다반사라고 얘기했다.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잠을 자면서도 고통 속에 소리 지르고, 급기야는 자는 중에 일어나 집안의 물건을 부수기까지 하셨다.
그때, 그 사건의 후유증이 수면 중에도 깨어있는 것처럼 아버지를 괴롭히고 있었다.
무의식 중에 따라따니고 있었다.
돌아가신 할머니께선 아버지를 위해서 초하루만 되시면 절에 가셔서 108배 기도를 하셨단다. 아버지의 마음의 병이 나아지기를 부모로서 지극정성을 다하셨다.
변변한 형편이 안되어 정신과치료를 엄두도 못 냈고, 그 당시엔 그런 병원이 시골에 있을 리 만무했다. 오직 할머니는 기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기도 덕분인지 아버지는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때도 있었다.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집성촌인 우리 마을 친척들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우리 아버지를 "바보"취급하기 일쑤였다.
그 사건으로 아버지의 두뇌는 정상인들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1991년도 어느 날.
할머니가 작고 하시기 전의 일이다.
남들이 보기에 팔랑귀와 어리숙한 모습을 지닌 아버지는 강원도에서 우리 마을로 이사와 10년을 지낸 용가네에게 보증을 잘 못서 집이 경매에 날아갈 뻔하기도 했었다.
우리 집만 보증을 선 것이 아니라, 십여 가구 전체가 보증을 서 동네가 시끌벅적거렸다.
다행히 우리 집은 고모의 도움으로 무사했다. 하나, 할아버지가 묻혀 계신 선산은 지키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어버렸다.
반평생 할아버지가 지키고 싶어 하신 재산은 뜬구름이 되어버렸다.
지금 아버지의 나이 반평생 지난 77년의 세월을 보내고 계신다. 아버지는 또 다른 병마와 싸우고 계신다.
골초였을 정도로 담배를 하루에 두갑 정도 태우시던 27년 전. 갑작 그래 가슴 쪽 통증을 호소하셨다. 급하게 119를 불러 병원으로 가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폐에 물이차고 뿌연 연기가 가득 차서 호흡곤란이 온 것이란다. "심근경색."
직접 응급실에서 ct 촬영을 본 순간, 왈칵 눈물이 쏟고 쳐 올랐다.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아버지는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호수를 입안으로 넣는 검사를 해야 하는데, 아버지는 구역질과 통증 때문에 하기 싫어했다.
온몸으로 저항하시면 뿌리치는 바람에 오빠 둘과 간호사들의 제재도 소용없었다.
원체 체력이 좋으셨던 분이라 장정 한두 명은 상대가 못되었다.
결국, 부분마취를 하고선 임시방편으로 가슴윗부분을 최소 절개해서 인위적으로 호수 삽입을 해 혈관이 흐르게 하였다.
다행히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
의사는 만일의 대비를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했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죽음과 삶의 고비를 또 하나 넘기고 계셨다.
그 후로 일절 담배를 찾지 않게 되었다.
더없이 좋은 일이라 여기는 것도 잠시.
3년 뒤 어느 날쯤 등 쪽이 가렵고 , 따가워 주기적으로 심근경색 약을 받으러 가는 병원에 진찰을 하니 "대상포진"이라 한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병이 더 심해져 지금까지 심근경색과 대상포진약을 복용하고 계신다.
한 달에 한번 정기점검을 하시고, 꾸준히 약복용을 하시지만, 노령으로 오는 질병은 막을 수가 없었다.
겨울이면 혈액손환이 잘되지 않아, 하루가 멀다 하고 한의원과 정형외과를 방문해 물리치료를 받으신다.
아픈 것을 누구보다 싫어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딸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 아빠, 많이 아파? 무조건 아프면 병원 가. 참지 말고. ' 이 말밖에 할 수가 없다.
자주 전화 드려도 청력이 떨어지셔셔 전화벨 소리를 잘 못 들으신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딸의 음성에
"오이야, 알았다"고마 대답하시고 서둘러 끊는 일이 많다. 이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아버지의 병명들.
약봉지가 비닐봉지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때면 가슴이 쪼여온다.
반 평생 한 남자의 인생이 약봉지들과 남은 노후를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목이 메어온다.
가끔 명절이나 생신. 어버이날 때 쥐어드리는 몇 푼 안 되는 용돈으로 자식도리 했다고 하는 못난 딸.
따스한 봄날이 돌아오면 아버지와 손잡고, 어린 시절 가족소풍 갔던 경주월드에 가봐야겠다.
본인의 두 걸음으로 다닐 수 있을 때까지.
아버지의 못난 딸이 함께 하겠다고.
더 나빠지시지 말고,
지금 이대로만 계시길 소원해 본다.
아버지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