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 뉴욕 맨하탄 32번가의 추억
사원에서 주임으로. 입사 2년을 채우고 처음으로 승진하면서 '~ 씨' 를 벗어나다
첫 회사는 경영지원 직군에서는 G1~G7이라는 밴드를 사용했고, 마케팅 직군은 M, 연구원은 E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G 직군이었고, 고졸은 G1 전문대졸 G2 대졸은 G3부터 시작을 하게 되었다.(지금은 7개 밴드를 4개 밴드로 줄인 것으로 알고 있다.) G3는 사원에서 주임까지, G4는 대리, G5 과장, G6 차장, G7은 부장 이런 식이었다. 그러니까 사원에서 주임까지는 하나의 밴드로 보듯이 실제로 사원에서 주임은 승진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호칭 변경정도로 생각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원에게 최한결 사원님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한 번도 못 봤고 그저 ~씨 자를 붙여서 '최한결 씨' 라고 부르곤 했다. 그래서 2년이 지나고 주임이 되었을 때는 - 자동진급이나 마찬가지라서 대단할 것은 전혀 없지만 - 드디어 명함에 최한결 이렇게 끝나는 게 아니고, 최한결 주임 이라고 끝나게 되어서 기쁜 마음이 들었다. 뭔가 나도 이제 제대로 된 직급이 부여된 것 같아서 나에게는 큰 의미였다. '최한결 주임님' , '최주임' 이라고 불리면서, 더 이상 '최한결 씨' 가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주임이 되었다는 것은 입사 3년 차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입의 느낌을 완전히 씻어내는 것이어서, '최주임' 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주임에서 대리로.
뉴욕에서 승진을 위한 원샷을 하다.
주임으로 진급하면서, 호칭이 '한결 씨' 에서 '최 주임' 으로 바뀌게 되어 개인적으로 상당히 좋았다. 그러나 사실 주임은 자동으로 진급하는 것이었고 외부의 시선 또한 그래봤자 사원'급'에 불과했다. 그런데, 대리는 주임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무엇보다 대리는 G4로 밴드를 승급하는 제대로 된 승진이었다. 물론, 주임에서 대리 진급에 있어서 - 큰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은 - 누락되는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거의 다 대리가 되긴 했던 것 같다.
누락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대리 진급은 정해진 걸 알면서도 충분히 기쁜 것이었다. 그 빡센 회사에서 4년은 했다는 훈장 같은 것이어서, 나는 대리라는 직급을 다는 것이 매우 좋았다. 처음에 신입사원으로 왔을 때 대리만 봐도 나는 언제 대리가 되나 싶었기 때문에, 막상 내가 대리가 된다고 하니 남다른 느낌이었다. 심지어 내가 신입사원 때 나에게는 엄청난 존재감이었던 사수마저도 대리 직전의 주임이었기 때문에, 내가 대리가 된다는 것은 그때의 사수보다도 높은 직급을 갖게 되는 큰 사건이었다.
이미 기획 부문에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지 4년이 되었다. 일을 잘하고 있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 상황이었고, 많은 선배님들 보기에도 기획 짬밥이 적은 친구는 아니다 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제 실제로 대리로 진급하면 뭔가 존재감이 확실해지는 것 같다는 어쭙잖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저 위에 부장 차장은 아예 높은 사람들이라 딴 세상 사람들이었지만 대리와 과장님들까지는 크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온 것이다. 특히 첫 회사에서는, 대리 이상부터는 이제 봐주는 것 없이 실력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온 터다. 그래서 주제넘게도, 뭔가 선배들과 동일한 링에 선다는 나름 설레는 각오까지 하게 되었다.
"최주임, 대리 발표 곧 난다던데?"
"네."
"대리 되는 거야?"
"네?"
"그거 뭐 다 되는 줄 아나?"
'아 또 왜 그러세요. 전무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는 가식적인 멘트를 날려주고.
'아.. 오늘 또 쉽지 않겠네..' 라는 생각을 한 곳은 뉴욕의 32번가에 있는 감미옥이라는 식당이었다.
첫 회사에서는 승진자 발표를 매년 2월 중순 경에 했던 것 같다. 다른 회사들이 보통 해당 연도의 12월에 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 회사는 2월에 발표를 하고 3월 1일부로 적용이 되는 시스템이었다. 그때가 2월 중순 정도 되었던 것 같은데, 그때 전무님을 모시고 뉴욕에 출장을 가 있었다. 원래 당시 팀장님, 그리고 손대리님이 전무님을 모시고 출장 다니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팀장님이 전무님을 의전하면서 모셔야 하는 와중에 투자자와의 미팅은 너무 많으니까 한 명 더 데리고 가서 미팅에 투입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다. 덕분에 나까지 같이 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기획에서 다시 IR로 돌아온 지 두 달 밖에 안되긴 했지만 기획에서의 3년 동안 많이 성장했고, 외국인들과의 미팅도 곧잘 해낼 수 있는 그리고 임원들 의전도 빠릿빠릿하게 해낼 수 있는.. '대리' 라는 직급이 되기에 충분한 역량이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손대리, 대리 다는 거 어렵지?"
"네, 전무님. 아무나 대리 되는 게 아니죠."
'아 이 사람들 뭐야. 다 달아주는 대리 가지고 또 짓궂게들 하시네.'
"아, 전무님. 대리 되어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손대리님이랑 나는 기수로 3년 차이여서 대리님은 이제 대리 4년 차가 되는 것이고, 나는 대리 1년 차를 맞이하려 하는 것이었다. 대리 진급이 절대 어려운 게 아닌데도 전무님이 또 짓궂게 하는 것은, 집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출장 중에 술을 한번 주고 싶어서인 것을 누가 모를까.
"최주임, 이거 마시면 내가 대리로 올려줄게."
'이럴 줄 알았다. 이런.. 소맥 한잔이다.'
가득 들어있진 않고 소주가 좀 적게 들어가고 총 잔의 2/3 정도였는데,
'이미 여러 번 쓰러졌습니다요! 아직도 저를 포기 못하신 겁니까?!'
'아 저거 먹으면 나는 또 쓰러진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강권하는 이유를 알기에, 이것은 피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네, 전무님. 제가 이거 마시고 대리 달겠습니다!"
"오, 좋아. OO에서 대리 아무나 못 달아. 마셔!"
걱정스럽게 보는 손대리님과 팀장님 얼굴이 잔 너머로 겹쳐 보이지만,
'뭐, 여기는 뉴욕이고 손대리님이랑 방도 같이 쓰는데 뭐, 알아서 잘 데리고 가서 알아서 재워주겠지.'
'그냥 마시고 전무님 면 한번 살려드리면서 다 같이 좋은 추억으로 남기자.' 라고 마음먹었다.
벌컥벌컥. 전무님의 짓궂음이 목구멍부터 위에까지 쫙 퍼지는 것이 느껴진다.
'아 너무 써.. 아.. 큰일 났다..'
5분이 되기도 전에, 심장은 쿵쾅쿵쾅. 머리가 깨질 듯. 잠은 쏟아지고. 그래서 눈만 뜨고 있었을 뿐. 정신은 이미 나가 있었다. 그래도 내가 그렇게 술을 한잔 호기롭게 먹고 헤롱헤롱 대고 있는 걸 보니, 전무님은 흐뭇한 거 같았다.
"자, 이제 최주임 아니고 최대리구나. 최대리, 한잔 더해!"
'망했다. 또?? 이미 재미는 있으신 게 아닙니까? 대리 되는 게 이리 어렵습니까..?'
그러나 전무님을 잘 알기에 정신은 비틀비틀, 하지만 손은 움직이지 않게끔 엄청난 집중력을 보이며 호기롭게 잔을 든다.
"고생했다. 최대리."
그러면서 내 의지와 달리 미세하게 떨리는 잔에, 초록은 동색이라고 했던가. 같은 초록인데 병이 좀 크다. ‘사이다!’
'이제 즐거움은 드렸구나…‘
‘그래, 여기서 한번 더 가자. 에라 모르겠다.'
"전무님, 한잔 더 마시겠습니다." 저 사이다병이 같은 작은 소주병으로 바뀌지 않길 바라면서, 객기를 부린다.
"오. 좋아. 근데 니가 한잔 더 마시면 손대리가 너무 힘들어져. 내일 미팅도 많잖아?"
손대리님도 객기 그만 부리라는 눈빛이다. 참 눈치가 빠른 선배다.
"네, 감사합니다. 전무님."
"그래, 최대리. 앞으로 열심히 해. 잘할 거야. 최대리는. 내가 엄청 기대하는 중이야."
복숭아나무 아래 도원결의를 하던 그들처럼, 뉴욕에서 내가 좋아하던 선배들과 함께 앞으로 대리로서 잘 해내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머릿고기 대신 설렁탕과 수육 앞에서.
지금이야 호칭 통일이 된 회사들이 많아서 이런 얘기들이 너무 꼰대스럽거나 신기한 일들이겠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추억이다. 마치 진급이 하나의 관문 같은 것이었고, 그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연봉도 좀 뛰고 주위의 축하도 받고 무엇보다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되는 그런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정말 우습지만 무용담처럼 '나는 대리 달았을 때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나도 대리 달기 위해 전무님한테 호기롭게 술도 먹고 했다.' 와 같은 말할 거리가 있었고, 주위에 자랑이 아닌 그저 웃픈 추억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추억 때문인지, 나는 진급이 주는 그 소중하고 기쁜 마음을 잘 안다. 그래서 호칭 통일 이전까지 후배들이 승진을 하면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 승진을 위해 그들이 많은 노력과 마음고생을 했었기 때문에 - 승진한 후배들에게 한번 쏘라는 얘기를 절대 하지 않고 - 케이크라도 하나 사주려고 노력한다.
그럼 그들은 집에 가서 '어떤 선배가 승진했다고 줬어.' 라고 할 텐데, 가족들은 우리 아내가 우리 남편이 우리 아들이 우리 딸이 회사에서 그래도 좋은 회사생활을 하고 있구나, 좋은 동료들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끔 그들 중에 몇몇은 가족들과 케이크를 같이 먹고 있다고 사진 찍어서 보내주기도 하는데, 그들에게 좋은 추억을 주었다는 생각에 너무 기쁜 마음이 든다. 내가 필요해서 케이크를 살 때는 뭐 이리 비싸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인데, 이럴 때 보면 케이크 하나가 정말 빵값의 원가로 따질 수는 없는 듯하다.
나는 사실 지금도 승진제도가 있으면 좋겠다. 호칭 통일이나 승진단계를 없애는 등의 제도가 수평적인 문화를 지향하는 취지를 갖고 있음은 매우 동의한다. 그러나, 진급으로 인한 그 하루의 기쁨과 이제는 나도 달리 불린다는 그 알량하지만 사람이라면 당연한 감정. 한편으로는 진급 누락으로 너무 슬프고 우울해서 이런 직급들 그냥 싹 다 없애버리자 라는 마음도 들긴 하지만..
어떤 마음이던지 그런 날 같이 어울려서 기뻐하고 슬퍼하면서, 축하하고 위로하는 것이 우리의 회사생활 아니었던가. 매니저 또는 프로라는 이름으로 진급 자체가 없는 생활은 아주 기뻤다가 아주 슬펐다가 하는, 추가적인 에너지가 많이 소모될 일은 없다. 그래, 그게 질척대지 않는 깔끔함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인생을 깔끔하게 살 수 있단 말인가. 에너지가 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이 들더라도 그게 곧 낭만이었던 시절로 기억하는 나는 여전히 깔끔하지 못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