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09 │ 승진은 회사생활의 꽃 그리고 가시
"팀장님, 저 이번에 또 안되면 진짜 퇴사할 겁니다."
술자리에서 옆 팀 후배가 말한다. 우리 팀원은 아니지만 아주 친하게 지내는 옆 팀 후배인데, 작년 초에도 차장 진급에서 누락되어서 위로를 해줬던 후배이다.
"범석아, 이번엔 되겠지! 걱정하지 마라!'
"아니에요, 이미 거의 결정 났을텐데 상무님이 요즘 저를 좀 피하시더라구요. 불안합니다. 왠지 또 떨어질 수도 있는 거 같아요."
"에이. 설마. 근데 회사가 참 문제긴 하다. 올해도 진급 대상자는 상당히 많은데 사장님이 승진비율을 오히려 줄인다고 하니까.. 그래도 너네 팀장님이 너를 엄청 밀고 있어. 기다려봐."
"아, 진짜 이번에 또 누락하면 챙피해서 회사 못 다닙니다."
"에이, 될 거라니까.."
'범석아, 사실 두 번 떨어지는 사람도 진짜 많아..' 라는 얘기는 차마 할 수 없었다.
그 술자리로부터 2주가 지난 어느 날.
"범석아."
"네.. 팀장님.."
"많이 힘들지? 내가 뭐라 해줄 말이 없다.."
"너무 힘들고 짜증 나네요. 진짜 너무 일하기가 싫어요. 그리고, 와이프한테 뭐라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번에는 반드시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집에다가 얘기 안 하면 안 되나?"
"네. 그러고 싶네요.. 차라리 승진 누락한 걸 아무도.. 아무도 모르면 좋을 텐데. 그렇기만 하다면 승진 떨어져도 참을 수 있는 건데.. 아무도 모르면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하던데.."
"그러게 말이다. 진짜 차라리 아무도 모르게 처리되면 좋을 텐데.."
그렇게 또, 올해도 또.. 위로의 술자리가 이어졌다.
많은 직장인들은 '평가와 승진이 회사생활의 다야..' 라고 말한다. 특히, 승진은 '회사생활의 꽃' 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도대체 그것들은 왜 중요한 것일까?
1) 평가와 승진으로 결국 보상이 산정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엄청난 업무적 성과를 창출했어도, 그래서 그 일로 인한 성취감이 정말 하늘을 찌른다 해도, 결국 승진과 평가로 마지막 구슬이 꿰어지는 것이다. 승진과 평가가 주는 보상의 맛은 회사마다 다를 수는 있지만, 달콤한 것이 사실이다. 좋은 평가로 인한 차별적인 성과급과 그러한 평가들이 모여서 승진하게 되면 받을 수 있는 연봉의 상승은, 결국 돈을 벌고자 회사생활을 묵묵히 참아내는 우리들에게 큰 보상이다. 특히, 1년마다 이루어지는 평가보다 4년 이상의 주기로 이루어지는 승진은 더욱 기쁜 일이다.
2) (사실 더 중요한 이유는..) 남의 눈이 의식되기 때문이다.
다른 팀원들보다 동기들보다 상대적은 낮은 평가를 계속 받으면 내가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자책하게 된다. 동기들은 둘째치고 후배들보다도 자꾸 승진이 늦어지면 '나는 못난 사람이다' 라는 인식을 스스로 강하게 하게 된다. 절대 못난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주위에서 그렇게까지 인식하는 사람이 실제로는 별로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저 스스로 자꾸 작아지게 된다.
'돈 더 안 받아도 되니까, 그래도 승진만 했으면 좋겠다. 챙피해서 못 다니겠다.' 라는 불만들을 보면 반드시 보상 이라는 당근 때문에 평가와 승진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당근보다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피라미드 인력구조를 갖고 있는 요즘의 회사들에서 승진은 매우 어렵다. 위로 갈수록 적체가 심하니까 계속해서 진급을 시켜주기는 힘들다. 친구가 있는 삼성전자에는 한 부서 전체인원 30명 중에 13명이 부장이라고 한다. 삼성전자는 부장으로 진급하려면 누락이 없더라도 입사 후 18년 정도가 걸리기 때문에 얼마나 적체가 심한지 알 수 있다. 그리고 후배가 있는 업계 수위 수준의 손해보험사에는 77년생인데도 과장인 사람이 매우 많다. 이렇듯 아마 대부분의 회사가 씨니어의 비중이 주니어의 비중보다 상대적으로 너무 높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과장 달기 위해 한번, 차장 때 두 번, 부장 때 세 번 정도의 누락은 이제 그렇게 큰일도 아닌 듯하다. 안타깝지만 '내가 올해 성과를 많이 냈으니까, 설마 누락하지는 않겠지..' 라는 생각은 매우 큰 착각이다. 왜냐하면 일만 잘한다고, 좋은 성과를 냈다고 해서 승진이 반드시 보장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회사라는 곳이 철저하게 공정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야말로 업적과 역량만으로 승진을 시켜주는 회사는 매우 드물다. 약간 달리 말해서, 업적과 역량만으로 승진이 되는 회사라면 업무역량이 평균에 불과(?)한 사람은 끝도 없이 누락을 거듭할 수도 있다. 평균 이상인 동기들과 후배들은 계속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한편, '제발 좀 공정하게 승진시킵시다.' 라고 주장하기에는, 평균 수준에 불과한 역량의 소유자가 우리 자신일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함부로 공정한 시스템의 부재나 의사결정의 올드함을 탓하면 안 될 것 같다. 오히려 회사의 승진 시스템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한다면 우리의 승진 누락을 합리화할 수 있고, 나아가서 승진의 가능성을 높이도록 면밀한 준비를 할 수도 있다.
도대체 무엇으로 승진이 결정되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면 4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는 듯하다.
1. 기본적으로 실적 그리고 역량
승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근거는 실적과 역량이다. 실적이라 함은 회사 손익에 얼마나 기여한 성과가 있었는가 라고 말할 수 있다. 대형 프로젝트를 일궈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작은 성과들이 합쳐져서 손익 개선에 기여한 부분을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매우 좋다. 비록 정량적인 실적이 아니더라도, 정성적 실적 또한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정성적 실적은 한 해 동안 계속해서 경영진에게 어필이 되어야 하고, 이 부분은 실적개선에 이어지지는 않더라도 경영진에서 '잘했다' 라는 말이 나올 수 있게끔 해야 한다.
회사라는 곳이 항상 실적이라는 것을 낼 수는 없기 때문에 역량 측면도 매우 중요하다. 실적이라는 것이 운이 따라줘야 한다는 것을 윗사람들도 다 알기 때문에 반드시 실적 그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물론, 그렇다 해도 실적이 최우선이긴 하다) 실적을 비록 내지 못했더라도, 역량이 매우 높다면 승진을 시키기에 충분하다. 예를 들어, 금융팀에서 CFA 보유자라던가. 사업팀에서 해당사업에 대한 높은 전문성이 있다던가. 대외협력팀에서 엄청난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다던가. 한다면 충분히 승진을 할 수 있다.
2. 연차
실적이 엄청난 것도 아니고, 역량도 변변치 않다면 승진을 영영 못하는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특별한 노이즈 없이 연차가 쌓인다는 것은 해당팀에서 '묵묵히' 노력해 왔다는 것이다. 회사는 그러한 묵묵한 노력에도 좋은 점수를 준다. 물론 레귤러한 승진 연차에 딱 맞게 승진을 못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적어도 1년 또는 2년 정도의 누락이 있었다면, 그때는 최우선순위의 진급 대상자로 올리게 되는 것이 대부분 회사의 현실이다. 팀장과 같은 리더 포지션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으나, 그전까지의 직급이라면 C 대상자의 쌓여가는 연차를 신경 안 쓸 수가 없다.
3. 라인
'뭐야. 저 사람이 어떻게 승진한 거야?'
'응? 실적도 역량도 없는데.. 뭐지? 그렇다고 누락을 여러 번 한 것도 아닌데..?'
'본부장님 라인이잖아..'
‘미전실 출신이잖아. 홀딩스에서 내려왔잖아..'
모든 회사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상당히 많은 회사에서 '라인'을 무시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그들만의 네트워크로서, 끌어주고 밀어주고 하면서 그들 간의 생존력을 높이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학연/지연/혈연은 요즘 시대에도 여전히 통하는 성공법칙 중의 하나이다.
내가 아는 선배 한 명은 절대 후배들에게 말을 놓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어떤 후배들을 만나도 존대를 한다. 다소 거리감은 있으나, 매우 좋은 모습이라고 항상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 선배는 고등학교 후배 앞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나와는 심지어 6년을 알고 지내왔는데도 아직도 말을 놓지 않는데, 같은 고등학교 후배와는 단 두 번째 만남에서 바로 말을 놓았다. 그 후배는 결국 지주사에서 길을 잘 닦아놓은 선배 덕에, 그룹 전체에서 보면 다소 작은 계열사에서 지주사로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룹의 컨트롤타워인 지주사 출신들은 또 그들만의 라인이 있다. 삼성의 미전실, SK의 홀딩스, LG의 (주)LG, 롯데의 정책본부 등이 그것이다. 여기 출신들은 실적과 연차 등에 구애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지주사에서 고생들을 많이 했다고는 하지만 다시 계열사로 내려와서 승진을 당연하게 하는 배경에는 아무래도 부러움과 뒷말이 남게 마련이다.
4. 특수 상황
흔히 말하는 ‘운’이다. 운 좋은 사람을 이길 수가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 대개 운은 어부지리와 같은 상황으로 나타난다. 당연히 진급해야 할 사람이 갑자기 더 좋은 회사로 이직을 한다던가, 힘 있는 계열사 또는 지주사 등으로 빠지면서 부서에 진급 대상자가 only one으로 바뀌는 경우들 같은 것 말이다.
심지어 당연히 될 사람 차례에는 구조조정 분위기가 물씬 나면서 ‘올해는 한번 쉬어’ 라는 말을 듣고 쉬었건만, 어떤 사람의 진급 타이밍에는 회사 실적이 대박 나서 웬만하면 진급을 다 시켜주는 분위기에 휩쓸려 실적 없고 연차 낮아도 승진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운은 현재 승진되어야 할 직급이 뭐냐에 따라서도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대리 때 가져야 할 운과 차장 때 가져야 하는 운은 (그 크기를 잴 수만 있다면) 분명 더 큰 운이 따라야 할 것이다. 특히 팀장이 된다던가 임원이 되는 시기에서는 커다란 운이 정말 꼭 필요해진다.
이 네 가지 요인 중에 스스로 컨트롤 가능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운도 아니고, 이미 형성되어 버린 라인도 아니다. 연차는 시간에 맡겨지는 것이기에 내가 시간을 빨리 돌릴 수도 없다. 그러면.. 결국 남는 것은 「실적과 역량」이다.
컨트롤 가능하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그것만큼은 핑계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승진에 목마른 사람들은 남들보다 우월한 성과에 목을 매는 것이다.
직급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컨트롤 가능한 요소인 성과는, 기본적으로 챙겨야 하기에 그에 대한 욕심이 커지게 된다. 특히 팀장 또는 부장들 중에 특별한 라인이 없고 연차는 쌓이고 있다면, 성과에 대한 조급함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끔 팀장 부장들 중에 후배들과 팀원들을 못 살게 구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일단 성과를 챙기긴 챙겼는데, 분명히 남들보다 좋은 성과를 냈는데도 승진이 안 되는 경우는 너무 많아서 속상한 것이 회사생활이다. 라인이 없어서 또는 라인의 힘이 약해서, 아니면 하필 갑자기 운이 안 좋아서 승진이 안 되는 경우는 종종 발생하는데 이럴 때 정말 힘이 쪽 빠지면서 현타가 심하게 나타난다. 그러니까 ‘열심히 해서 뭐 하냐. 회사 진짜 짜증 난다..’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라인이 없다고 운이 안 따른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아니 포기하면 안 된다.
건강한 조직이라면(시기가 좀 걸릴 수는 있으나) 그래도 결국 열심히 노력한 사람과 성과가 계속 나오는 사람을 알아준다. 그렇게 성과를 계속 내고 있거나 역량적으로 매우 훌륭함을 갖췄다면 (건강한) 조직은 그런 사람을 놓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시기의 문제일 뿐이다.
그 시기를 견딘다면 잘 될 텐데, 그러기가 어려운 것이 또 사람인지라. 정말 힘들다. 나 역시 그런 인내심에서는 정말 부족함이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라 감히 조언해 줄 자격도 없고 조언의 진정성도 없다. 다만, 내가 인내심이 약해서 허우적댈 때 주변의 선배들은 나에게 이런 얘기를 했었다.
'최차장, 너무 티 내지 마..'
회사를 나갈게 아니라면 화를 못 참고 너무 대놓고 티를 내는 것은,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는 사람으로 인식되기 쉽다. 그렇게 되면 과차장 때는 몰라도 부장으로 또는 팀장으로 진급해야 할 때는 감정 컨트롤이 부족하여 조직을 이끌 능력이 없다는 평판으로 이어져, 오히려 감점이 될 수 있으니 반드시 유의해야 한다.
어떤 회사는 12월말에, 어떤 회사는 1월에 하기도 승진발표가 나기도 하고 삼성 같은 경우는 보통 2월말에 발표가 나면서 3월 1일부로 진급을 하곤 한다. 지금 시기 정도가 아마 승진을 못했던 사람들이 이제 겨우 속이 달래졌거나, 아직도 울분에 차서 짜증 난 체로 회사를 다니고 있을 것이다.
위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진작에 다 진급해 놓고, 지금의 씨니어 팀원들에게만 지금의 적체를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지만 그것이 현실인 것을 어쩌겠는가. 누군가는 진급을 하고 누군가는 좋은 평가를 받는 현실을 어쩌겠는가.
일단 열심히 잘 해내자. 그러고 나서 기회들을 잡자. 당신은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고, 기회를 잡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표지 출처 : 드라마 '나의 아저씨' 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