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02 │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추측
약 20년 전에 한 대기업에서 호칭을 통일한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시초였는데, 본격적으로 대기업들이 호칭을 통일하기 시작한 것은 5년 전 정도부터 시작된 것 같다. 삼성은 프로, LG는 책임/선임, 현대차는 매니저/책임매니저, SK는 매니저 라는 호칭을 쓰는 듯하고, 그 외 많은 대기업들이 호칭을 통일시키면서 이제 더 이상 과거에 쓰던 대리/과장/차장/부장 등의 호칭은 사라지고 있다.
내가 다니는 회사 역시 4년 전부터 호칭을 매니저로 통일하였는데, 그 바로 직전에 부장 - 임원이 아닌 직원 중에서는 보통 마지막 직급으로 인식된다 - 으로 승진하였기 때문에 나는 다행히도(?) 직원에서의 승진이라는 것을 다 해볼 수는 있었다.
당시 호칭 통일 - 사원부터 부장까지 모두 단일직급 체계로 하여 '매니저' 하나로 통일을 했다 - 을 하면서 벌어진 일들을 생각해 보면 사원들은 대리 직급으로 승진하기 전까지는 특별한 호칭 없이 OO씨 라고 불리곤 했는데, 그들도 매니저라는 직급이 생기고 그 호칭으로 불리게 되어 다소 뿌듯한 면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예전에 사원 생활을 2년 거치고 주임이 되었을 때 더 이상 한결씨 라고 불리지 않는 것이 참 좋았었는데, 그런 기분과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부장 또는 진급을 코 앞에 둔 차장이나 과장들은 오히려 직급이 떨어진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원도 매니저이고 차/부장도 매니저인 상황에서 그들이 그 직급을 얻기까지의 노력이, 일시에 물거품이 된 것 같은 느낌을 가진 것이다. 특히 Manager 라는 단어가 보통 과장 직급에 대한 영문명이었기 때문에, 차장(Senior Manager)이나 부장(General Manager)은 직급이 오히려 강등된 듯한 우울함이 더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 동안은 - 호칭을 통일하여 시스템상에서는 모두 매니저라고 되어 있으나 - 차장과 부장들에게는 나름의 예우를 담아 박매니저님이 아닌 박차장님 또는 정매니저님이 아닌 정부장님 이라고 부르곤 했다.
일부 주니어들은 '그냥 직급이 있는 게 편한 것 같아요' 라는 친구들도 있고, 반대로 일부 차부장들은 '뭐 상관없어요. 직급이 벼슬인가요.' 라는 직원들도 있는 것 보면, 반드시 주니어던 시니어던 한 방향으로 호칭통일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직원들 각자가 직급에 대한 감정과 생각이 다른데도, 왜 대기업들은 호칭 통일을 굳이 하는 것일까. 나의 소견으로는 아마도 3가지 이유를 떠올리게 된다.
첫 번째는, 변화 시도 - 라고 쓰고 남들 따라하기 라고 읽는다 - 의 작은 출발이다.
'남들 따라하기? 너무 무책임한 이유 아니야?' 라고 말하겠지만, 그래서 진짜 이렇게까지 얘기하고 싶지 않지만, 이것은 분명 사실에 가깝다. 다른 대기업이 호칭 통일 제도를 다들 도입하니까 우리만 뒤처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인사조직을 담당하는 부서 또는 경영진의 입장에서는, 변화에 둔감한 회사라는 이미지는 극히 피하고 싶기 때문에 일단 변화에 올라타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특히 삼성을 비롯한 굴지의 대기업들이 좋은 롤모델이기도 하지만, 뭔가 변화를 선도하는 이미지의 '네카라쿠배당토' 같은 기업들에서 호칭통일 제도는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호칭 통일은 기업의 조직문화 변화를 상징하는 것 중의 하나라고 여기는 듯하다.
일부 기업은 호칭 통일 제도를 도입했다가 다시 호칭 제도를 부활시켰는데, 이것은 그래도 ’호칭 통일 제도를 우리도 했었다. 근데 불만들이 오히려 많아서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다‘ 라고 얘기하기 쉽다. 그러니까 그런 회사는 변화의 변화를 꾀하는 것처럼 노력하는 느낌이라도 주는데, 아예 호칭 통일 자체를 하지 않는 회사들은 스스로 고인 물임을 인정하는 것처럼 자타가 인식하기 때문에 일단 제도 도입을 시도하면서 변화해보려 하는 것이다.
그래도, 변화를 해보겠다는 회사의 노력이 귀엽게 보인다. 이건 비꼬는 것이 아니라, 사실 인사팀을 마냥 욕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대부분 역시 조직문화 개선/변화에 대한 아주 획기적으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두 번째는 수평적 문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원 대리들은 호칭 통일 제도를 더 좋아하는 듯하다. 아무래도 선배들과 같은 직급이 주는 - 그래서 선배가 또는 거래 상대방이 '이 친구가 직급이 뭐야?' 라는 생각 자체를 안 갖게 함으로써 - 뭔가 대등한 입장을 가진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차부장들도 직급이 주는 어느 정도의 권위(?)를 자의던 타의던 내려놓으면서 최대한 평등한 발언권이 있고 주니어의 의견을 수렴해 보자 라는 생각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조금은 시소가 전보다 수평으로 맞춰지게 된다.
후배들이 일하는 데에 있어서 꿀리지 마라, 선배들도 일할 때 권위를 내세우지 마라 라는 취지는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선후배의 개념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국 문화에서, 회사가 수평적 문화의 온전한 정착을 기대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다. 아무리 사내 게시판에서 직급이 조회되지 않도록 막아놓는다 하더라도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선배인 줄 뻔히 아는데, 선배와 수평적으로 대등하게 지내기는 오히려 후배가 더 불편한 마음이 들 수도 있다.
또한 회사라는 곳이 업무에 대한 경험과 네트워크, 그리고 조직과 사람들의 Dynamics를 많이 알아야 일을 더욱 잘할 수 있는 것은 매우 명확하기 때문에, 후배들이 선배들과 동등한 퍼포먼스 또는 동등한 퀄리티의 의견을 내는 것은 쉽지 - 물론 이것은 평균적인 선배와 후배를 가정하는 것이다 - 않다. 특히, 이러한 생각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차부장들은 안타깝게도 이 제도를 통해 오히려 동기가 저하되는 경우도 많다.
세 번째는 직급별 피라미드가 역삼각 구조이기 때문에 나오는 회사의 궁여지책이다.
아쉽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이 진짜 호칭 통일의 이면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회사들이 이런 제도를 가져갈 수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직원들에게 수평적 문화를 내세우며 안내할 수밖에 이유는, 사실 이 이면을 감추고 싶은 것이 아닐까 라고 느껴진다.
과거 대한민국이 고도성장을 했을 때는 대부분의 회사에서 직원들 연령 분포가 피라미드 구조였다. 위로 올라갈수록 사람이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고도성장 하면서 회사는 커지는데 직원들의 승진은 안 시켜줄 명분도 없었고, 승진자가 많이 나온다고 해서 피라미드 구조가 갑자기 고구마 구조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승진에 관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도성장의 시대와는 달리 지금의 시대는 회사들의 성장이 더 이상 뚜렷하게 발산될 수 없고 그저 성장이라는 것을 꾸준하게라도 하면 다행인 것이다.
이렇게 성장이 더딘 시대에, 조직의 구조상 밑에서 승진을 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빨리빨리 승진을 하던가 또는 빠져나가주던가 해야 하는데 윗사람들이 그 자리 그대로 있다. 예전에는 본인보다 후배가 승진을 해서 임원이 되거나, 본인 스스로 임원 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면 회사를 나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그런 사람들이 점점 드물어지고 - 이건 남얘기가 아니라 곧 나에게도 들이닥칠 상황일 것이기 때문에 그분들을 절대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저 상황에 대한 팩트를 언급하는 것이다 - 있다. 위에서부터 정체가 되어 있기 때문에 밑에서는 당연히 위로 올라갈 수가 없다. 정체되어 있는 직급에 계속해서 밑으로부터의 승진이 이루어진다면 회사에 차부장과 같은 씨니어직급의 비율이 말도 안 되게 늘어날 - 이미 많은 회사들의 차부장 비율이 대리사원 비율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회사는 계속해서 승진을 시켜줄 수가 없다. 직급 적체가 너무 심한 어떤 보험사에서는 회사 생활 15년을 했는데도 아직 과장이 되지 않은 사람도 있다. 차장 진급을 2번 정도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부장 문턱에서 진급을 5년째 못한 사람들의 얘기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데 나이가 들수록 깊이 공감이 된다.
승진은 회사생활의 꽃이다. (승진에 대한 기쁨과 슬픔은 다음에 또 자세히 쓰겠지만) 과장 차장 등을 오래 머물면 당연히 승진을 하고 싶은 것이고 그렇게 승진을 해야 동기부여도 되면서 로열티를 갖게 되는데, 회사는 모두 다 승진을 시켜줄 수 없기 때문에 매우 낮은 비율로 승진자를 관리한다. 점점 더 누락자가 많이 생기면서 승진에 대한 불만은 점증적으로 쌓여 간다.
회사 생활 10년 이상된 많은 시행착오와 잘 구축된 네트워크를 갖추어서, 가장 써먹기(?) 좋은 직급이 바로 과차장이다. 그런 과차장들 사이에 누락자가 늘어나면서 발생된 짜증과 로열티 저하는 결국 회사 전체의 생산성을 무참히 떨어뜨릴 수 있다. 낮은 생산성으로 회사의 성장이 더디게 나타나고 그러면 진급의 기회는 더욱 줄어들고 악순환의 연속이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우려하여 회사가 택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승진 누락 개념을 없애버려서,
과차장들의 동요를 막자
회사 전체에 공표되는 - 실제 인사 시스템 상에서 내부적으로 관리되는 밴드 또는 직급은 따로 있을 수 있다 - 승진 누락의 개념을 없애버린다면, '저 선배는 또 누락되었어.' , '그 차장님 벌써 3번째 누락 아니야?' 같은 대화가 아예 안 나올 것이다. 또한 누락될뻔한 과차장의 입장에서도 그나마 덜 창피한 상황 - 사실 그들이 잘 못해서 누락하는 것이 아니고 회사의 저성장과 인구구조상 그럴 수밖에 없는 건데도 - 을 맞이할 수 있다. 내부적인 시스템에서 승진(승급) 결과를 인사팀과 본인과 상사만 알게 만들어놓으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없다. 맘대로 되지는 않지만 슬픈 감정을 숨길 수만 있다면 짜증과 분노와 부끄러움을 남이 모르게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을 노리고 회사은 호칭 통일을 시도하는 게 아닐까 라는 추측은 우리의 슬픈 현실일 것이다.
호칭 통일 제도에 장점이 있다는 것은 절대 부정하지 않는다. 직급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겠다는 취지는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이다. 혹자의 '직급이 뭐 얼마나 대단한 것이라고, 아직도 우리나라 서열주의 못 벗어났네.' 라는 생각에 이성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 제도의 장점이 잘 살려서 진정 좋은 제도로 거듭나길 진심으로 바란다. 사원대리들이 직급 때문에 위축될 것 없이 더욱 당차게 일을 해나갈 수 있게 된다면 회사의 미래는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는 듯한 성장이 기다린다. 더욱이, 지금 매니저로 시작하는 사원들이 나중에 현재의 부장 같은 회사생활을 하게 되는 때에는, 그런 문화 속에서 자랐기에 진짜로 수평적 문화가 자리 잡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당장’만 보면 과거의 호칭제도를 경험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과 제도 이후에 입사하여 이것이 당연한 사람들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 같은 과도기에서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는 보완장치가 필요하다. 많은 경험과 네트워크로 회사의 생산성 향상에 기여하면서도 어쭙잖은 권위는 모두 내려놓는 선배. 당찬 포부와 창의적 아이디어로 지금과는 다른 퍼포먼스를 내면서도 선배에 대한 Respect가 있는 후배. 선배와 후배 모두 이성뿐 아니라 감성까지도 이 제도에 동의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솔루션이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