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 Investor Relations. 투자자를 상대하라
버스가 끼익 하고 선다.
이미 올라오는 길에 서울인 것은 확인을 했고, 사대문 안에 들어가더니 그룹 본사 건물 앞에서 내리게 되었다. 아! 나는 서울에서 근무하는 것이 맞나 보다.
서울에도 뭔가 있나 보다 라는 생각으로 들떠야 하는데, 나는 사실 들뜨지 못했다. 왜냐하면 방금 전 버스 안에서 또 쓸데없이 얄궂은 신의 장난처럼 외국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룹에는 다양한 외국인이 이미 많았고, 계열사별로 외국인이 특히 많은 곳도 있었기 때문에 그 버스에 외국인이 탄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굳이 그 타이밍에 걸려버렸다.
"Hi. Can i ask.."
사실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캔아이에스크로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얘기한 게 아닌가라고 추측을 하는데, 암튼 갑자기 나에게 뭔가를 물어보는 게 아닌가. 뭔가 느낌상, 그 묘한 느낌으로 이 버스가 본사 가기 전에 어딘가를 들리냐 라는 질문인 것 같았다.
'아, 젠장. 큰일 났다.'
내 뒤에는 앞으로 내가 모셔야 할 팀장님이 계시는데 와 이거 뭐야. 운명의 장난인가. 벌써부터 나를 시험하는 건가. 왜 갑자기 영어로 물어보고 난리야. 침착하자 침착하자 라고 마음속으로 외치지만 입밖으로는 전혀 침착할 수 없었다.
입술은 떨리고 몸은 미세하게 꼬이고 있었다. 나는 그때 어떻게 대답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버벅댔고 분명 손짓을 많이 썼으며 분명 그 외국인은 제대로 못 알아들었을 것이다.
'아 제발 좀 그만 물어보세요. 저 영어 못해요.'
'더 묻지 마시고, 아 얘는 영어 안 통하네 하면서 얼른 저리 가 주세요.'
이윽고 외국인은 물러났지만, 나의 식은땀은 물러나지 않고 등뒤에서 송골송골 빚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분명 '아 영어 진짜 못하는 놈'으로 팀장님에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식은땀을 흘리며 버스에서 한바탕 홍역을 치렀으니, 버스에서 내릴 때 내가 마냥 들떠있을 수는 없었다. 남대문의 저 큰 아치가 마치 크게 웃음 짓는 것 같았고, 더욱더 작아지고 우울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그래도 영어 잘한다는 뻥을 치지는 않았잖아!' 라고 위안하며 터덜터덜 팀장님을 따라 걷는다.
내가 갈 건물은 하얀색의 그룹 본사 건물과는 달리, 팀장님 얼굴처럼 거무튀튀했다. 엘베를 타고, 17층에 내린다. 내리자마자 정면에 보이는 우리 회사 로고가 보인다. 아 여기도 우리 회사야? 라는 생각에. 뭐지. 뭐지. 하면서 8학군은 무슨, 그저 시골사람처럼 팀장님만 따라간다. 사무실로 들어가니 여기도 또 낮은 파티션들의 대향연이긴 한데, 수원 본사 건물의 그 Headquater 층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은 공간이다.
'이것은 땅값 차이 때문인가. 서울과 지방의 인구밀도 같은 느낌이군.'
내가 따라간 곳의 부서에는 팀장님 제외하고 5명이 앉아있었고 어색한 인사들을 해주신다. 같은 부서의 내 선배님들이겠지. 인사부터 잘하자.
"안녕하십니까?"
"네, 거기 끝에 앉으세요. 거기가 자리예요"
"네, 알겠습니다."
자리에 앉고 가방을 자리에 놓고 펜과 다이어리 정도는 꺼내려고 하는데, 팀장님이 소집을 한다.
"다 회의실로 와보세요."
나까지 총 7명이 회의실로 향한다. 쫄래쫄래. 뭐라도 들고 가야 할 것 같아서 회사 다이어리를 들고
선배들을 따라간다. 다들 슬리퍼를 신고 가는 느낌이었는데, 나는 구두를 신고 쫓아간다.
회의실은 독특했다. 쇼파가 여러 개 있고, 다른 의자는 없었다. 회의실 같지 않고, 쇼파가 주욱 있는 응접실 같은 느낌.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는 서울사무소라서 가끔 본사에서 윗분들이 그룹 본사에 오시는 길에 들리곤 하는데, 그분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했다. 일명 'VIP실'.
팀장님이 가운데 앉고 뭔가 서열상으로 앉는 느낌이어서, 나는 눈치껏 끝에 앉는다.
"이제부터 우리 팀에 오게 된 최한결 씨입니다. 우리 팀 온 걸 환영합니다."
짝짝짝.
"최한결입니다."
간결하고 굵게, 쫄지 않은 척, 당당한 척을 해본다. 적당히 중간 정도 직급 되어 보이는, 안경 쓰고 작은 고추가 맵다 처럼 생긴 분이 말을 건넨다.
갑자기 여기 와서 놀랐지? 여긴 IR팀이야.
IR 이라고 알아요?
'응? 나는 IR이 뭐 하는 팀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뭐지.'
"음.. 잘 모르겠습니다."
"Investor Relation이라고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설명하고, 실적발표회 같은 거 하는 곳이야."
"아, 네 알겠습니다."
'오 뭐야. 뭔가 있어 보인다'
"암튼 서울로 처음 출근하고, 처음이야. 우리 팀에서 신입사원을 뽑은 건."
"아,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랬다. 이 팀은 회사의 여러 사업들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투자자들에게 설명을 해줄 수 있고 재무적인 부분도 확실하게 숙지해야만 올 수 있는 IR 이라는 부서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내 바로 위에 사수가 사내 짬밥 높은 사람이 오면 본인이 계속 막내를 하게 되니까, 윗분들을 잘 설득해서 신입사원을 받자고 주장한 모양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신입사원으로서는 처음으로 이 부서에 오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팀은 IR 팀이 되었고, 당시 일요일 저녁만 되면 우울해진다는 많은 회사원들과는 달리, 나는 월요일에 회사 나가는 게 전혀 싫지 않을 정도로 나의 적성에 딱 맞는 팀에 3일간의 면벽수련 끝에 행운이 깃들어 들어올 수 있었다.
당시 내 자리에 있던 책상은 그야말로 편수책상이라 불리는, 지금 주니어들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초록색 융이 깔려있고 그 위에 유리가 얹어있는 그런 전형적인 옛날 책상이었다. 의자 역시 요즘은 기업들이 의자에 돈을 안 아낀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인데, 그때만 해도 그냥 바퀴가 있으면 그걸로 좋은 거구나 라고 생각하는 수준이었다. 전화기 역시, 지금이야 핸드폰으로 다 바뀌어서 자리에 전화기가 없는 경우도 많지만, 과거에는 전화기에 버튼만 12개 달려있어서 번호 누르는 데에는 불편함 없게 해 줄게. 대신 다른 기능 따위는 몰라 라고 말하는 듯한 투박하고 둔탁한 흰색의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LED로 만든 패널들은 나중에서야 나왔으니까, 당시는 아마 PDP 패널을 썼을 것 같은데 모니터 화면이 17인치 정도 되지 않았나 싶다.
나중에 사대문 안에 있다가 강남으로 이사 갈 때나 되어서야 그 집기들을 전부 버리고, 새로운 사무용 가구들이 배치되었는데, 처음에 하도 구식의 가구들을 써서 그런지 하얀 깨끗한 가구를 나중에 봤을 때는 정말 너무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