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생 첫 명함 = 인생 네 번째 신분증?

05 | 학생증, 민증, 운전면허증 그리고 !

by 아우구스티노



"한결 씨, 문방구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팀에서 유일한 여자 선배님이 말을 해준다. 이 분은 나랑 연차가 5년 정도 나던 분인데, 아주 살갑지는 않으셨지만 항상 나에게 잘해주셨다.

"아, 별로 없습니다. 혹시 어떻게 사는 건지만 알려주시면 제가 사겠습니다."

"아니에요, 처음 왔으니까 원래 선배들이 처음엔 챙겨주는 거예요."

"아네, 감사합니다."

"일단, 자리에서 컴퓨터 잘 되는지 보고, 당장 명함 줘야 하는 일이 많을 테니까 명함부터 만들어야 해요.

이따가 정리 좀 되면 알려주세요."

따뜻하다. 아, 첫날 정신없는 와중에 왠지 모를 따뜻함이 느껴졌다.

"네, 감사합니다."


컴퓨터로 회사망에 접속하고, 동기들의 fwd가 20개도 넘게 달린 시시껄렁한 메일들을 빠르게 얼른 읽어치우고, 섣불리 이런 거 보고 있다가 찍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단 엑셀이나 열어놓자'

그렇게 엑셀을 열려고 하는 순간,

"한결 씨, 인사하러 갑시다."

여기서 막내같이 보이는 바로 위 선배가 즐거울 얼굴로 내 뒤에 바로 서 있다.

'누구에게 인사하는 거지?'

신입사원은 특별히 묻지 않는다. 그저 선배들이 시키면 네 라고 할 뿐. "네." 하면서 의자에 걸어두었던 양복쟈켓을 다시 입는다.


"우리 팀 말고, 옆에 자금팀도 있고 홍보팀이랑 대관팀이 있어. 거기에 인사할 거야."

나중에 알게 되지만, 이 사람이 나의 사수였고, 나의 회사생활에 어마어마하게 영향을 준 좋은 선배였다.

"서울사무소에 있어야 하는 팀들이야. 투자자 만나야 하고, 금융기관이랑 기자 만나고 해야 하니까."

"대관팀은 뭐 하는 팀인가요?

'어떤 장소 같은 곳을 빌리는 팀인가?'

"대관(對官), 관을 상대한다는 뜻이야. 관이라는 건 관리, 그러니까 정부라고 생각하면 돼"

"아, 네 알겠습니다."

'하긴, 이런 팀도 있긴 있어야겠네. 회사라는 곳은 별 팀이 다 있구나."


자금팀, 홍보팀, 대관팀을 돌면서 신입사원답게 깍듯한 인사를 드린다.

"축하해, 좋은 팀 온걸." , "축하합니다. 신입사원이 이런 팀에도 오네." , "뭐 빽이 있는 건가?"라는

얘기들을 듣게 되었다.

'아, 저는 빽이 하나도 없습니다. 근데, 뭔가 좋은 팀 온건 맞는가 보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곳은 한 팀에 6~7명 정도 있었으니까, 서울사무소 전체 식구는 30명 정도 되었다. 그 정도 사람들이고, 군대로 따지면 파견부대이고 높은 인구밀도로 옹기종기 서로서로 친하게 지내는 듯했다.


그렇게 인사를 다 돌고, 자리에 앉았다. 아까 그 여자선배님이 내 바로 뒷자리엔데, 뒤를 돌아 말씀하신다.

"한결 씨, 명함 만들건데 영어이름 있어요?"

'오. 영어이름. 드디어. 나도 뭔가 영어이름 쓰는구나. 근데 어떤 영어이름을 쓴담?'

버스 타고 올라올 때의 그 창피함 때문인지, 영어로 또 위축되고 싶지 않아서 대학교 때 다녔던 영어회화 학원에서 쓰던 이름을 마치 오랫동안 쓰던 나의 영어이름이었던냥 자랑스럽게 내놓는다.

"롸이언(Ryan)으로 써도 되나요? 알 와이 에이 엔 입니다."

"Ryan? 멋있네."

말씀이라도 참 감사하게 해 주신다. 지금 생각해도 좋았던 선배님.

사실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인데, 아 그냥 HK라고 쓸걸,


오히려 한글 이름을 영어이니셜로 쓰는 게 더 쿨하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예를 들어, 이름이 김태경 이라고 하면 티케이(T.K.), 최정준이라고 하면 제이제이(J.J.), 오경석 이라 하면 케이에스(K.S.) 라는 식이다. 아무 연고 없이 뜬금없는 영어이름은 마치 사대적인 발상으로 나중에는 창피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내 생각일 뿐이지만 외국에서 공부 한번 안 해본 토종의 입장에서는 그저 영어이니셜이 더 있어 보인다는 주변의 얘기도 많았다. 특히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가 유독 이니셜을 많이 쓰는데, 그게 그 사람을 지칭하는 데에 있어서 훨씬 설명력이 높아서 영어이름으로서 훨씬 와닿는다.


그래도, 아주 오랫동안 지속해서 신입사원 때부터 Ryan이라는 이름으로 18년을 넘게 보냈더니, 이제 주위에서는 Ryan 하면 그래도 나를 먼저 떠올리게 될 정도로 여기저기 퍼져버린 이름이라서 그런지, 지금은 Ryan이라는 이름에 상당한 애착이 있다.


"알겠어요. 그럼 Ryan Choi로 할게요. 따로 자격증은 없죠? CFA, CPA 뭐 그런 거."

'아. 부끄럽지만..'

"네, 없습니다.."

"저도 없어요~"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했던 첫날로부터 이틀 뒤, 나의 책상에는 명함이 놓여 있었다. 서울사무소 전체의 업무지원 해주는 여직원이 계셨는데, 우리 팀 선배님이 그분에게 전달을 해준 것 같고, 그럼 업무지원 해주는 여직원 분이 주문을 맡기고 등기 같은 것으로 받아서 나의 책상에 둔 것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왜냐하면 처음만 선배님이 해주신 것이고 그 이후에는, 우리 팀이 명함을 쓸 일이 많아서 수시로 명함을 만들곤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업무지원 해주는 분에게 요청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스템 상에서 다 신청이 되고 알아서 자리 위에 명함이 배달되는 경우도 많겠지만, 그때는 이런 업무지원 해주는 분들이 있었는데 그분들에게는 항상 잘 보여야 했다. 그래야 업무처리가 빠르게 되곤 했다.


책상으로 배달된 명함 플라스틱 뚜껑을 열어본다. 아이폰을 사서 처음 언팩을 하는 느낌이 그랬을까. 조심스럽게 그리고 경건하게 열어본 뚜껑 밑에서, 파란 로고가 있는 하얀 명함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IR팀, 최한결, 사원 / IR Team, Ryan Choi, Associate "

그렇게 나의 인생, 첫 명함이 나왔다.





내 이름 옆에는 라이센스가 없다. 대부분 없는 사람이 더 많긴 하겠지만, 젊었을 때 좀 따놓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많다.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사실 공부를 한다는 게 어려움이 많았지만, 혹자는 '그거 다 핑계예요'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IR팀의 차장님은 애 셋을 기르면서도 저녁마다 도서관을 향하며 결국 CFA를 최종 합격했던 모습을 보여주셨다.


여하튼, 명함을 보면 이름 옆에 획득한 자격증, License 등을 적는 경우가 많다. 명함이라는 것이 자신을 나타내는 정보가 담겨있기 때문에 자격 정보를 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응당 해야 하는 것이 맞다. 다양한 명함을 받아봤지만, 나의 업무 영역이 대부분 전략/금융 분야였기 때문에 대부분 자격의 범위가 비슷했다.


먼저 명함을 받고 한번 더 보게 되는 자격은 Ph.D이다. 박사님이라는 얘기인데, 사회에서 학사 석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박사는 그래도 놀라움을 갖게 된다. '박사라고?' , '어디서 어느 전공으로 박사를 하셨을까?' , '적어도 한 분야에 대해서는 진짜 엄청 전문가이겠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박사공부를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그래도 박사를 따려면 그 시간적인 노력뿐 아니라 논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라는 컨센서스가 있다. 그래서 Ph.D는 높게 봐준다. 어떨 때는 직급이 아니라, 실제로 박사님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다. 특히 같은 회사가 아닌 경우, 거래 관계에 있거나 여하튼 외부 사람인데 Ph.D라고 적힌 명함을 주면, 그 직급에 상관없이 박사님이라고 호칭해주는 경우도 더러 있다.


또 다르게 보는 자격증이 CFA이다. 적어도 금융 분야에서는 CPA보다도 CFA 자격이 더욱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CPA 자격이 마치 고시를 통과하듯 아주 전문자격증으로 인식되어 더 높은 License 인 것처럼 되어 있으나, 우리나라와 달리 외국에서는 CPA가 그렇게 높은 자격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 AICPA(USCPA)를 KICPA보다 더 낮게 보는 것처럼, 해외에서 CPA가 매우 높은 수준의 자격증은 아니다. 오히려 글로벌 금융 세계에서는, CFA가 훨씬 자주 보이고 CFA를 더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있다. 내가 만난 수많은, 그리고 엄청난 운용사들의 높은 매니저들은 CFA가 대부분이었다. Capital, Blackrock, ADIA, GIC 등 매니저 중에 정말 많은 사람들의 명함에는 CFA가 새겨져 있었다. 금융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면 CFA 자격을 획득하길 강력하게 권한다.


CPA도 이름 옆에 많이 쓰여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CPA 자격이 상당히 인정받는다. 그 공부량을 이겨냈다는 Respect가 담긴다. 과거 몇 년 전까지는 저소득 전문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여서 회계법인에서 기업으로 넘어온 회계사들도 많았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회계감사가 상당히 강화되면서 CPA 몸값이 매우 올랐고, 그로 인해 다시 회계법인으로 돌아가는 회계사도 생기는 등, CPA 인기가 다시 또 높아지고 있다. 어떤 분야의 회사이던지 CPA는 귀하게 모시고, 중요하게 취급한다.


이름 옆에 쓰는 경우도 있긴 한데, 직급을 나타내는 곳에 주로 쓰이는 것이 바로 변호사 타이틀이다. 물론 변호사 타이틀이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중요하고, Respect도 듬뿍이다. 다만, 일하는 곳이 대부분 법제/법무팀 같은 곳이고 김광태세 같은 로펌이다 보니 일반 직원들이 만나는 일은 많지가 않다.


그에 반해, MBA를 명함에 쓰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오히려 누군가 명함의 이름 옆에 MBA라고 표시한 것을 보면, '뭐야. 누가 MBA도 쓰나?' 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MBA는 학위에 불과해서 그럴 수도 있고, 너무 흔해서 그럴 수도 있는 것 같다. 나도 그렇고 주변의 많은 MBA 학위자들 중에 표시하는 사람은 정말 거의 없다.


국제 FRM은 가끔 쓰는 경우가 있고, 기술사 같은 자격도 쓰여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본다. 아마도 더 많은 자격이 있겠지만, 내가 명함에서 본 자격은 이 정도 수준이다.


물론 명함의 이름 옆에 이름보다 작게 쓰여있는 자격이 일을 잘하냐 못하냐 를 판가름해주지는 못한다. 다만, 일을 잘하는데 자격도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좀 더 좋은 배경이 될 것이고, 반대로 일을 못하는데 자격이 있다고 하면 자격에 따른 쓰임이 어딘가에 있을 수는 있으니, 자격을 갖추는 데에 적극적인 것은 훌륭한 모습니다. 안타깝게도 나이가 들면 자격을 갖추기가 더 힘들어진다. 결혼하여 처자식 키우는 데에 시간을 보내야 하고, 회사에서도 핵심 직급이 되어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핑계가 너무 완벽하기 때문이다.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주식에 투자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여 좋은 자격을 갖추어 놓는 것은, 주식으로 버는 돈보다 훨씬 크고 안정적인 캐쉬플로우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정말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다음 에피소드에 나오는 이야기 ]


"팀장님, 신입사원도 뎃고 가나요?"

"어 그럽시다. 한 명 더 자리는 되는 곳이지?"

"네, 넓은 자리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IR은 뭐하는 부서일까.